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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Jun 02. 2016

 순응하고 추모하는 사회를 넘어서  

땡땡이를 치듯 초치원으로


조치원에 있는 세종고등학교에서 교육과정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달라기에 출장 신청을 내고 일찍 학교를 나와 기차를 타고 조치원으로 향했다.


조치원역

6시 연수 시간에 맞추어 기차를 타고 조치원을 향했다. 일을 하러 오긴 했지만 해가 제법 길어져 여전히 환한 햇살이 남아있는 시간에 조치원이라는 동네에 와 있으니 놀러 온 기분도 들고 학교를 땡땡이친 기분도 들고 먼길의 여정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방충망 너머로 보이는 학교


조금 일찍 도착해 교무실에 앉아 내어주신 커피를 한잔 먹다가 창밖으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방충망 너머로 보이는 아이들이 꼭 방충망에 갇힌 아이들처럼 보였다.


연수장소인 도서관

세종고의 도서관은 참 좋았다. 들어서자마자 사서 선생님께 가장 먼저 건넨 말이 "도서관 수업하기 참 좋네요"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없었다. 사고와 관리 이유로 방과 후에 도서관은 개방되지 않는다. 이건 세종고 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고와 관리의 책임, 그리고 교사들의 업무시간 보장과 같은 요소들이 더해져 대부분의 학교의 방과 후 학생들의 시설 사용에는 제한이 있다. 이 좋은 도서관에서 방과 후에 자유롭게 책을 읽을 따위의 권리와 낭만 같은 건 우리나라의 고등학생들에게는 없다.

'창의적 체험활동'과 '개별화 교육'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와 사례를 나누고 8시 반쯤 학교를 나왔다.


'나의 문제'로 환원되는 사회


해가 진 시간. 교문을 벗어나 담배를 한대 물고는 집으로 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이미 어두워진 시간에 하교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쓰러움은 이제서야 집에 가는 고등학생들의 고된 생활의 안쓰러움이 아니라 하교를 해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세종고에는 두 동의 기숙사가 있다. 한 동은 최상위권 아이들이 머무는 기숙사, 다른 한 동은 차상위권 아이들이 머무는 기숙사이다. 여전히 기숙사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고 지금 이 시간에 집으로 가는 아이들은 성적 때문에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다.

많은 공공 예산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방과 후 프로그램에 투여된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는 아이들도 들을 수 있는 특강이라고는 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는 아이들은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단다.

아이들이 문제제기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가 공부를 못해서' 혹은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저기에 꼭...'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공공자금으로 제공되는 기회의 불평등함이 개인의 문제로 그대로 환원되고 있었다.


이번 주 우리 반 학급 자치 시간에 '해야 할 일들' 만을 결정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학생의 권리'에 대해 말하며 학교 생활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불편함 혹은 부당함을 공적으로 표명해보는 방식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아이들은 과도한 수행평가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들이 시간관리를 잘 못해서...' 등의 개인의 요인으로 돌리며 성찰과 반성을 했다. 난 그런 아이들에게 '개인의 요인의 보편화로 인한 문제 발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나 시스템의 문제 즉 교사회 혹은 학교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개인의 문제로 성찰하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교사회나 학교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맞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아이들의 '착함'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다.


개인의 요인에 인한 문제가 보편적 현상이라면 그건 더 이상 개인의 요인에 의한 문제가 아니다


추모하는 사회


강남역 사건에 의해 구의역 사건이 일어나면서 추모의 물결이 지속되고 있다.

추모의 과정 속에서 한국사회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공론화되고 있다는 점은 참 바람직한 현상이나 추모에서 그치는 대한민국 사회와 세종고의 아이들이 자꾸 겹쳐진다.

워낙 무능하고 악랄한 정권의 계속되는 실정 속에서 나타는 대한민국의 사회문제가 연이어 드러나면서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던 사회'에서 '공공의 추모가 이루어지는 사회'로 점차 나아가고는 있지만 '왜 거기까지인가?' 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분노하는 사회


이런저런 안타까움과 고민을 안고 다시 기차를 타고 올라오며 페이스북을 보다가 반가운 게시물 하나를 발견하였다. '추모를 넘어선 분노의 행동 표출'의 게시물을...





'평화의 미덕'을 뒤집어 씌우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거나 , '비겁한 평화주의'를 양산시키는 이 사회에 정면 도전하는 용기의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평화'를 찬사 하기보다는 '분노'를 지지하자.

'여성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이 사회의 남성성'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지지와 동참으로 이 운동을 인식하자.


설사 당신이 '남성'일지라도 그것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직상상사의 권위로 인한 당신들의 고통', '당신의 딸과 아내의 일상생활에서의 안전', '당신들의 여자친구의 행복'을 위한 행동일 것이다.


최소한 당신들이 그게 '개인의 문제'라고 느낀다면 그런데  그런 '개인의 문제'가 자꾸 반복되어 '사회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문제인 개인'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인식해주었으면 한다.


올바른 사회에 대한 대의적 움직임이 아니라 최소한 당신의 딸과 아내와 여동생과 여자친구와 여성인 제자만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합리적 개인'으로서 현명한 선택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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