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페스트>에 나오는 의사 리외는 본인에게 페스트는 '끝없는 패배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코로나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울과 같이 인구 밀도가 높고, 유동 인구도 많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끝없는 패배지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배웠다. 닭장 같은 건물에 모여 살면서 콩나물시루 같은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하는 도시 생활자들에게, 인파를 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대도시는 바이러스의 주 무대가 된다. 도시인들을 숙주로 하여 번성하고 변이 되면서 제 할 일을 기꺼이 끝까지 해낸다. 그 기세는 아무리 엄격한 방역조치를 취한다 해도 꺾을 수가 없다. 감염률 0%를 목표로 빡빡한 방역조치를 취하고 있는 나라마저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염병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바이러스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인간은 방어태세나 유지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시의 발달은 인간의 편의와 부를 증가시켰지만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문제를 가속화시켰고, 빈부의 격차를 넓혔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고립시켰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고립이라니. 우스운 일이다. 아니, 잔인한 일이다. 외로움이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더 오롯이 느껴지는 법이니까. 콘크리트로 사방을 막아 높이 올린 주거지는 이웃 간의 교류를 어렵게 만든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생태계는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과 교감할 공간은 턱없이 부족해서 인간의 영혼은 더욱 메말라간다. 길고 길었던 격리(그것이 강제적이었든 자발적이었든 간에)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당 딸린 집을 그리워했는지를 돌아본다. 네모난 창밖으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만으로는 갇힌 자로서의 구속감이 해소되지 않는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있어야, 그렇게 벽과 지붕으로부터 분리되는 일말의 시간이라도 있어야, 그제야 진짜 숨을 쉬는 것만 같다. 바깥에 나가 햇살과 바람을 온전히 느끼는 일, 공기의 온도나 밀도 혹은 냄새 같은 것들로 계절이나 시간을 짐작하는 일은 지구 상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허락된 위로다. 그것을 빼앗긴 도시인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며 절감한다.
오로지 편의성을 중심으로 계획된 도시는 인간의 일상을 세련되고 편리하게 해 줄지는 몰라도 보다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동화 <시골쥐와 서울쥐>에서 서울에 놀러 간 시골쥐가 괜히 기겁을 하고 시골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자고로 속이 평안해야 사는 맛이 나는 법.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르나? 도시인들에게 일자리가 있는 도시를 떠나기란, 한번 익숙해진 편리한 인프라를 포기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보상심리로 주말이면 자연을 찾아 예의 그 '힐링'을 했던 것인데... 코로나가 돌면서 그마저도 힘들어진 것이다. 또 한 번 전염병이 돌고 외출이 자유롭지 않게 되는 날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 시간을 미치지 않고 다시 버텨낼 수 있을까?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마당은 어렵더라도 차선으로 테라스가 딸린 집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바라건대, 이 경험을 시작으로 도시의 주거환경이 바뀌길 기대해본다. 마당이든 테라스든 오픈된 공간을 더 많이 설치하고, 접근이 쉬운 초록 공간도 더 늘었으면 좋겠다. 재택근무의 가능성을 보았으니, 도시 밖에 살아도 근무가 가능한 회사들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남편이 재직 중인 회사의 서울 사무실의 경우,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적극 권장하는 한편 사무실 규모는 반으로 줄였다. 이제 사무실에는 '내 자리'가 없다. 계획된 출근일에 맞춰 사전에 책상을 예약해두어야 한다. 이런 변화는 기업의 부동산 임대료 부담을 덜어주고, 직원들의 효율적인 업무를 가능케 해주며, 도시 인구 집중도 또한 낮춰줄 것이다.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더 나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고, 재앙은 또다시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