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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May 11. 2022

뜨거운 점심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오전의 일을 마친 뒤, 남편과 나는 점심을 사 먹을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얼마 전 해변에 놀러 갔다가 온 가족이 심한 일광화상을 얻은 뒤라 캡 모자를 쓰고 양산까지 펼쳐 들었다. 정오의 태양은 자비가 없다. 말 그대로 살을 태워버리는 직사광. 그 무시무시한 빛살을 피해 동그란 그늘 아래 숨었다. 하늘은 이 열기 따위 아랑곳 않고 아름답게 파랗다. 이런 걸 보고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할 수 있나. '그림의 떡'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이곳의 예쁜 하늘은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서 바라볼 때라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고 모래사장에 눕는다거나 풀밭에 누워있다가는 사람 구이가 되기 십상이다. 야외 활동을 하기엔 너무 더운 싱가포르.

길거리는 점심식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우리 동네에는 회사가 많아서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가장 활기를 띤다. 중년의 남자가 홀로 푸트코트에 앉아 완탕면을 먹는다.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은 시원한 식당에 모여 앉아 락사를 먹는다. 히잡을 둘러쓴 눈이 예쁜 아주머니는 야외 테이블에서 나시르막을 먹고, 작업화를 신은 노동자 두어 명은 나무 그늘 아래 엉덩이를 깔고 앉아 비리야니를 먹는다.

우리는 일본 라멘을 먹기로 한다.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하고 깔끔한 식당을 선택했다. 주방이 훤히 건너 보이는 자리에 앉아 홀로 고군분투하는 요리사를 본다. 바쁜 점심시간. 요리사는 쉴 틈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서빙되고 그릇에 담겨 나온 돈코츠 라멘의 플레이팅은 완벽하다. 기예인가. 저 요리사 기예를 부리고 있다. 저런 탁월성은 어디에서 오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딸이 먹고 싶다던 수박과 내일 아침 마실 우유를 샀다. 마트에서 나오자마자 훅 끼쳐오는 열기에 혹시나 우유가 상하지 않을까 마음이 바쁘다. 바쁜 마음으로 열심히 걷고 있는데 남편이 물었다.

"방금, 봤어?"

"뭐?"

"수로 다리 밑에. 어떤 남자가 자고 있어."

"아, 정말? 졸린가 보다. 정말 피곤한가 봐."

"응."

"저, 근데.... 자는 거 맞아?"

"?"

"혹시 죽은 거 아니지? 자는 거지?"

"아, 응. 자는 거였어."

"어떻게 확신해?"

"자고 있었으니까."

그의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대책 없게 들리면서도 어쩐지 믿음직스럽다고 느껴지는 답변.

다리 밑에서 자고 있는 남자라... 점심시간을 쪼개 다리 밑에서 잠을 청하게 되는 고단함이란 어떤 것일까? 한번 도 본 적 없는 그 남자에 대해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그는 분명 기숙사에 살면서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하는, 피부가 어두운 외국인 육체노동자일 거다. 모국으로 돌아가면 상당한 돈이 될 임금을 받아 모으느라 무슨 일이든 해내는, 마음에 희망을 품은 사람일 거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년의 젊음을 보냈던 우리 아빠도 그런 고단함을 겪었을까? 쉬는 시간에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그의 낮잠이 부디 달콤하기를 바라며 우유를 냉장고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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