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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Mar 14. 2021

한국생활 11년 차, 아직도 한국말이 서툰 남자

   남편이 한국어학당을 다니며 한창 한국어를 배우던 시절,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연애하던 시절, 그가 한글 시험을 보고 온 날이었다. 시험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틀린 문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그가 말했다.     

“이 문제, 납득이 가게 설명 좀 해줄 수 있어?”     

시험지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정성 들여 눌러쓴 글씨체도 귀엽고, 문제를 틀린 건 더 귀여워서. 자세히 보니 빈칸에 '할머니'라고 쓰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할어머니'라고 적었고, 선생님은 빨간 엑스를 그어놓았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남편이 오답을 적어낸 시험지

“아버지에 할을 붙여서 ‘할아버지’가 되잖아. 그래서 어머니에 할을 붙여서 ‘할어머니’라고 썼지. 근데 틀렸어. 글쎄, ‘할머니’가 정답이래.”     

사기당한 표정으로 억울함을 풀어놓는 그.     

“어머나, 맞네. 당신 말 듣고 보니 ‘할어머니’가 완전 논리적인 답이네. 근데 정답은 ‘할머니’야. 왜냐고? 그냥, 원래 그래. 알잖아, 언어에는 원래 예외가 많은 거. 영어에 불규칙 동사가 있듯이.”     

말은 이렇게 해놓고 ‘할어머니’가 ‘할머니’가 된 연유를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그건 바로 활음조 현상 때문이라는데, 요는 편안한 발음을 위한 거란다. 글쎄, ‘할어머니’나, ‘할머니’나 매 한 가지 같은데... 어쨌거나 나는 ‘할어머니’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날에는 시계 읽는 법 가지고 투덜댔다.

“시(hour)는 한시, 두시, 세시, 이렇게 읽으면서 왜 분(minute)은 일분, 이분, 삼분, 이렇게 읽는 거야? 정말 헷갈려.”

“어라, 정말 그러네? 신기하다! 난 여태 그걸 눈치 못 채고 있었어!”     

시계를 매일 그렇게 읽어왔으면서 몰랐던 거다. 시와 분을 다른 방법으로 세어 읽는다는 것을.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배우는 남편 덕에, 한국어를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이 당시의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이처럼 한국어 공부에 열심을 내던 그때의 한국어 꿈나무는 어느덧 한국생활 11년 차에 들어섰다. 하지만 다들 놀라지 마시길. 그는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긴, 원래 말도 안 되는 말이기는 하다. 개가 어떻게 사람의 말을!     


   아무래도 그는 언어에 영 소질이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국말 잘하길 바라는 소망은 접어둔 지 오래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다 잘한담? 한국말 못 하면 어때. 지금껏 함께 잘 살아왔는걸. 나는 개의치 않는다. 가끔 이렇게 놀리기는 한다. 여태 이 정도로 한국어를 못하는 건 안 배우려고 굳게 마음먹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아니냐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때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가끔 듣는다. 아무래도 모국어가 다르다 보니 답답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 중,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 왔는가를 돌아보면, 언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 맞다. 우리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영어, 한국어, 프랑스어를 적당히 섞어 외계어를 만들어 가며, 그렇게 지낸다.      


   남편이 한국말을 잘 못해서 제일 아쉬운 사람은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 아빠다. 사위랑 오순도순 이야기도 나누고 좀 놀리고도 싶으실 텐데, 그게 안 되니 섭섭하실 만하다. 그 마음을 담아 자꾸 “이웃집 찰스”라는 TV 프로그램을 추천하신다. 거기 나오는 외국인들이 다 한국말을 잘 한 다며, 그거 보면 우리 사위도 자극을 좀 받아서 한국어 공부 다시 하지 않겠느냐며. 아빠에겐 죄송스럽지만.... 남편은 글렀다. 아무래도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괜스레 ‘말이 안 통하니 갈등도 없고 얼마나 좋으냐’며 너스레를 떤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친정에 가면 남편은 잘 놀고 온다. 이건 가족 내부 비밀인데, 우리 넷(친정 부모님과 우리 부부)은 오래전부터 고스톱을 쳐왔다. 연애시절 내가 남편에게 가장 잘한 일이 바로 고스톱을 가르친 거다. 이렇게 복잡하고 룰도 많은 카드게임을 서툰 영어로 가르쳤다니, 나 스스로가 대견할 따름. 셋이 판을 돌리는 동안, 광 팔고 게임에서 빠진 한 사람은 간식도 차려오고 아이들도 본다. 완벽한 합이다. 이것도 비밀인데, 그의 고스톱 어휘력은 원어민 급이다.     


   언어라는 도구는 제대로 갖추지 않았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소통해가며 살아가는 남편이 신통하다. 타국 살이 하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분명 있을 거다. 가끔은 외로움이나 억울함으로 괴롭기도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불만 없이 한국살이를 즐거워해주니 고맙다. 한국어를 배우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은 아닌지 가끔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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