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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Mar 14. 2021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

존중이 없었을 뿐

   프랑스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 집 아이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빠와 엄마를 반 반 닮았다. 부모 눈에는 마냥 사랑스러운 모습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일으킨다. 사람은 호기심이 생기면 그 대상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가게 되어있다. 우리 아이들을 보고, 남편과 나를 본다. 티 안 나게 힐끔 쳐다보는 사람은 최소한의 예의가 있는 사람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살짝 크게 뜬 눈으로 시간을 들여 빤히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꽤 자주 만난다.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면 당혹스럽다. 아이들에게는 약간 공포스러울 것 같다. ‘빤히 쳐다봄’을 견디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나는 매번 마음이 쓰인다. 그럴 때면 아이들의 얼굴을 가슴팍으로 안아주거나, 시선을 막는 위치로 내 자리를 옮긴다.

가끔은 그런 사람에게 조용히 말을 걸 때도 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일단 말을 던져놓고 나면, 대개의 경우, 사람들의 인상은 급변한다. 따뜻하게. 그리고 대답한다.

“아이가 너무 예뻐서요.”

빤히 쳐다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이럴 때마다 나는 길을 잃은 기분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분명 불쾌했는데, 저리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미소를 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 불쾌함을 표현해야 하는 건지, 아이를 예쁘게 봐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어떤 이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적당히 넘어가면 될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내 마음에 분명한 자국이 남는 걸 어쩌나.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이런 비슷한 일들을 이따금 겪게 되는 것 같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던 말이나 행동에 마음이 상했던 경험. 혹은 반대로, 의도치 않게 상대의 기분을 망쳐버린 경험. 누구나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거다. 전자의 경우 ‘예민하다’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고, 후자의 경우엔 ‘경솔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양쪽에게 모두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 덜 억울한 쪽은 본인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쪽 아닐까.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잘 전달하는 일, 누구에게나 고민과 연습이 필요한 일 같다. 오해를 줄이면 쓸데없는 감정 소비도 줄일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선한 마음을 오해받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아이가 예쁘게 보이면 미소 띤 얼굴로 바라봐주면 될 일이다. ‘안녕? 넌 참 사랑스러운 아이구나’ 말을 건네주면 더 분명하겠다. 그러면 아이는 상대의 호의를 단번에 알 수 있겠지. 빤히 쳐다볼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마음을.


     사실 빤히 쳐다보는 것은 본인의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시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솔한 태도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내가 그때 왜 불쾌감을 느꼈는지 더욱 명확해졌다.


     나야말로 이런 일에 실수가 많은 사람이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실수가 별로 없지만, 외려 가까운 지인이나 친구, 가족에게 실수가 많다. 가볍게 내뱉는 말이나 행동 때문인데, 별 뜻도 없고 나쁜 의도는 더더욱 없는 언행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다친다.


   고등학생 때 한 번은 아버지를 사고로 잃은 지 얼마 안 된 친구에게 밸런타인데이에 아빠에게 무엇을 선물해 줄 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답할 말을 찾느라 당황한 친구에게 빨리 말해달라며 재촉까지 했다. 장례식까지 다녀왔던 나인데, 그 일을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어찌나 무심하고 경솔했는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


     우리에게는 상대의 입장을 가늠하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앎이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며, 세상 모든 것을 경험하기엔 우리의 인생이 유한하기에. 잘 모르니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주의를 기울이며 조심하려 한다. 가깝고 편안한 사이일수록 방심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주 방심하고, 종종 실수한다. 참 어렵다.


     희망적인 변화는 있다. 전보다 촉이 예민해져 내 실수를 금방 눈치채기도 하고 실수 자체가 줄기도 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적어지니 마음이 평화롭다. 이렇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나중엔 따뜻한 마음만 전하는 멋진 할머니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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