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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Aug 28. 2022

비행기 안에서

내 안의 백인우월주의

라스트콜을 들으며 싱가포르행 에어프랑스 항공기에 올랐다. 서둘러 좌석을 찾아 엉덩이를 붙이고 머릿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OK. 낙오자 없이 모두 탑승 완료!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공항에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체크인과 수화물 처리에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우리 차례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발생한 항공사 시스템 오류 때문이었다. 결국 항공사는 체크인 카운터를 건너편으로 옮겼는데, 대기줄 맨 끝에 있는 사람부터 새로운 카운터로 안내하는 바람에 속에서 열불이 터지기도 했다. 오래 기다려온 사람일수록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황. 얼굴을 찌푸릴지언정, 아무도 항의하지는 않았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이라는 이 국제적인 장소에서 각자의 품위를 지키는데 모두가 성공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고, 그게 제일 중요했다. 그 외 다른 해프닝들은 잊는 게 정신건강에 좋았다.


비행기가 안전고도에 이르자 아이들에게 먼저 키즈밀이 서빙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음식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미 간단한 요기를 한 데다가 영상물 속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꿈나라로 떠났을 늦은 시간, 아이들은 초인의 힘을 발휘하며 두 눈을 빛냈다. 결국 나중에 챙겨줄 만한 음료만 따로 빼두고 나머지는 갤리로 가져다 주기로 했다. 마침 우리 앞자리에 앉은 승객도 먹다 남은 키즈밀 하나를 반납하고 돌아 나오는 참이었다. 기내에서는 주변을 심플하게 만들수록 좋다. 비좁은 이코노미석에서는 더욱. 하물며, 딱 옴짝달싹할 공간만 허락된 좌석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아이들 곁에 두는 건 위험한 일이다. 아이들의 무심한 움직임에 트레이가 떨어지기 십상이고, 음식물로 난장판이 된 좌석을 치우는 일은 상상만 해도 피곤하니까.


갤리로 가보니 한 중년의 남성 승무원이 기내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Excuse me,...."

승무원의 두 눈은 올리브 색이었다. 서양인의 눈 색깔은 동양인에 비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두 눈이 내 손에 들린 트레이로 향했다. 이제 팔을 내 쪽으로 뻗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하던 일을 계속 이어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식판을 가져다주시면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승객이 200명이 넘어요. 모든 승객이 당신처럼 식판을 가지고 오면 어떻겠어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자리에 계시면 우리가 수거하러 갑니다."

마스크로 가려진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나중에서야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표정은 굳이 목격할 필요가 없다. 


유난히 바쁜 시간에 내가 눈치 없이 성가시게 군 것이 분명했다. 마치 선생님한테 혼난 학생 꼴로 알겠다고 말하며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이번만'을 강조하며 마침내 손을 뻗은 그는 트레이를 건네받자마자 바로 내용물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 촤르르. 너무나 신속하고 간단한 처리. 그 순간, 조금 전에 느꼈던 불편함이 불쾌함으로 확 번졌다. 그런 기분에도 불구하고, 감사 인사는 잊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무개념 승객, 정확히는 무개념 동양인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Thank you."


자리에 돌아온 뒤로 점점 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꼭 저런 식으로 말했어야 했나 싶었다. 문득, 나보다 앞서 식판을 반납한 앞자리 승객에게도 훈계를 늘어놓았을지 궁금해졌다. 그 승객이 갤리 쪽으로 들어갔다 나온 시간은 매우 짧았던 것 같은데. 대화가 오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단 몇 초였던 것 같은데. 

'혹시... 나한테만 싫은 소리를 한 거 아니야? 내가 만만해서? 저 사람은 백인이고 나는 동양인이라서?' 


모멸감이 들었다. 동시에 혹시 이게 피해의식은 아닌가 하는 자기 검열이 시작됐다. 이 불쾌함이 정당한 것인지. 내가 상황을 지나치게 부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다른 승객도 속사포 같은 불평불만을 들은 건 아닐지. 이건 인종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과로로 인한 신경예민증 혹은 단순히 직업정신의 문제는 아닐지.


진실이야 어쨌든, 기분이 상한 건 상한 거였다. 그것이야말로 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차별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랬다. 내가 보고 들은 다른 비서양권, 비백인(非白人)의 경험에 의하면 그랬다. 비백인은 같은 실수 앞에서도 더 가혹한 시선을 받는다. 개인으로서의 비백인은 너무도 쉽게 한 인종의 대표로 여겨진다. 비백인의 언행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편견으로 인해 오해된다. 비백인의 문화와 관습은 비주류로 분류된다. 자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백인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비백인들로부터도. 비백인들 끼리도. 


이제 와서 'Thank you'라고 말한 것이 후회됐다. 불쾌한 상황에서마저, 내 기분은 뒤로 하고, 괜찮은 동양인으로 보이기를 우선했던 나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졌다. 괜찮은 사람도 아니고, 괜찮은 동양인 이라니. 한 백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했던 내 무의식을 마주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한 걸음 물러서고, 한 단계 내려서는 내 자의식이 부끄러웠다. 백인인 남편과 동등한 부부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 속에 박힌 뿌리 깊은 백인우월주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승무원에게 다시 돌아가 그럼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건 제대로 된 거라고 생각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승객의 안전과 편안한 비행을 위해서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효율적으로 기내식을 배급하고 수거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무슨 무료 급식소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따지지는 못했다. 나는 다만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그의 뒤통수를 흘겨볼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고, 그게 제일 중요했다. 그 외 다른 해프닝들은 잊는 게 정신건강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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