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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Sep 26. 2022

치과와 스티커


몇 주 전부터 이가 아프다는 딸아이를 데리고 치과에 갔다. 이가 안 좋아 어릴 적부터 치과에 자주 드나든 나는 젊은 나이에 잇몸 수술에 임플란트까지 한 치아 약골이다. 그 고통을 알기에, 아이들 양치질에 특히 신경을 쓴다. 매일 저녁 치실을 사용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큰 아이는 여태 충치가 하나도 없는데, 둘째 아이는 벌써 레진으로 때운 이도 있고, 크라운으로 씌운 이도 있다. 건치도 타고나는 게 분명하다.


걱정을 안고 찾아간 치과 대기실에서, 아이는 겁이 난다고 했다.

"딸, 겁이 나는 건 당연해. 엄마도 치과에 오면 겁이 나거든. 그런데 막상 치료가 그렇게 아프지는 않더라. 솔직히 말하면 마취주사. 그것만 딱 아파. 한.. 2초? 3초? 그 뒤론 아프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랑 이상한 냄새가 나서 우리가 지레 겁을 먹는 것 같아."

치과에 갈 때마다 내가 내게 되뇌던 주문이었다. 한 번도 그 주문이 통한 적은 없지만. 후덜덜.


3개월마다 치과 검진을 다니면서 치과에 대한 나쁜 기억만 쌓은 건 아니다. 검진 결과 아무 이상 없다는 소리를 듣고 나온 적도 여러 번 있다. 한국의 키즈치과에는 천장에 티비가 설치되어 있는데(실로 훌륭한 설비다. K-치과 클래스), 좋아하는 <캐치 티니핑>이라는 만화를 거기서 처음 접하기도 했다. 그날의 충치치료는 순조로웠고, 선물로 첫 티니핑 피규어를 손에 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싱가포르고, 천장 티비는 물론 티니핑도 없을뿐더러, 우리가 내원한 곳은 키즈 치과도 아니다. 하얗고 깨끗한 보통의 치과일 뿐. 게다가 일반 검진이 아니라 아파서 내원한 것인 만큼, 솔직히 나도 겁이 났다. 엉엉 울면서 충치치료를 받다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컥컥 대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의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에 들어갈 시간이 다가왔다. 쭈뼛거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진료실로 들어서는데 입구에 있는 이동식 트롤리에 스티커 몇 장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어머, 여기 예쁜 스티커가 있네. 용감한 친구들에게 주는 선물인가 봐!"

아이는 스티커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엄마, 나 씩씩하게 치료받고 스티커 받을래요!"

통했다. 오늘 나의 작은 성취. 이게 뭐라고 전율이 느껴졌다. 스티커에 넘어가는 저 순수를 꼭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자 아이는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크게 벌렸다. 세상 그 누구보다 저 순간의 긴장감을 잘 아는 나이기에, 그 모습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마음속으로 아이를 열렬히 응원했다.


진찰 결과 다행히도 충치는 없었다. 치아가 깨끗하다는 칭찬까지 들었다(이 대목에서 어찌나 어깨가 으쓱하던지). 아이가 불편함을 느끼는 건 아마도 영구치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잇몸만 있는 안쪽 자리에서 영구치가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흔들리는 이 하나 없는 애가 영구치라니. 조금 황당스럽긴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사람 몸은 다 다르니까. 어쨌든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센스 있는 치위생사 선생님은 진료실을 나가기 전 스티커 여러 장을 아이 앞에 내려놓으셨다. 선물로 한 장을 골라가라는 말씀과 함께. 그런데 아이는 스티커를 쉽게 고르지 못했다. 그중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가만 보니 놓여있는 스티커는 모두 비슷했다. 공주나 예쁜 여자아이 스티커 하나에 드레스와 구두, 가방, 액세서리 모양의 스티커가 여러 개 적당히 섞여 세트로 묶여 있었다. 아이는 예쁜 것보다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시크릿 쥬쥬 보다는 티니핑을, 엘사보다는 키티를 편애하는 아이. 나는 양해를 구하고 트롤리 아래 칸에서 다른 종류의 스티커 몇 장을 꺼내 보였다.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침내 기분 좋게 귀여운 동물 스티커를 골라 들었다. 오늘의 치과 방문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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