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는 때로
거짓말쟁이 어른이 필요하다
딸아이 유치원의 테러대비훈련과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얼마 전 딸아이의 유치원에서는 테러를 대비한 훈련이 있었다. 소방훈련이나 지진대피훈련은 종종 들어봤는데, 테러대비 훈련이라니. 세상이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이 진행되기 몇 주 전부터, 학교 측에서는 여러 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 아이들의 불안감 유발을 방지하기 위해, 숨바꼭질 놀이를 할 것이라고 일러둘 예정이니 가정에서도 그렇게 지도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세심한 배려가 감사했다. 훈련이 있기 며칠 전 유치원에서 돌아온 딸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목요일에 유치원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한대요. 스피커에서 알람이 들리면 시작되는데, 까만 옷을 입은 악당이 술래래요. 저는 교실 벽에 꼭 붙어있을 거예요. 절대 못 찾게요!"
선생님의 말씀을 잘 기억했다가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의 입술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 술래가 우리 레아는 끝까지 못 찾아낼 것 같아. 레아는 숨바꼭질 왕이니까!"
필연적으로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간 5세 꼬마 조수아와 그의 아버지 귀도가 등장한다. 아들에게 이 참혹한 현실(훈련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을 설명할 길이 없는 귀도는 우리는 게임을 하는 중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독일군의 말을 엉터리로 통역하며 1000점을 먼저 딴 사람은 탱크(조수아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게임의 목표까지 던진다. 이런 아버지의 거짓말 덕에, 조수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용소 생활을 잘 지나온다. 훗날 그 시간을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으로까지 간직할 수 있게 된다.
힘든 현실과 공포를 이겨내는 데에는 희망이 필요하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거짓말도 때로 구원이 되어줄 수 있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에서는 방어기제 중 하나로 부정(Denial)을 꼽는다. 우리는 때로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이건 거짓말이야."라는 말로 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하지만 거짓말이 끝까지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까? 거짓말은 현타의 순간을 늦춰줄 뿐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거짓말이 제거된 날것의 실제를 마주한 순간, 사람은 누구나 넘어지게 되어있다. 넘어져 있다가 다시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넘어진 상태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기도 하고.... 분명한 건 넘어지지 않고는, 넘어져서 아프지 않고는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외에 달리 돌아갈 길은 없다.
시간이 흘러 조수아가 충분히 자랐을 때, 그에게도 어김없이 현타의 순간이 왔을 것이다. 끔찍한 전쟁과 차별, 고문과 학살로 얼룩진 역사를 마주하는 날이. 그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아버지를 낯설게 발견하는 날이. 희미한 기억과 사람들의 진술과 책에 기록된 역사 사이에서 그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얼마나 흔들리고 얼마나 아팠든, 그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거짓말이 자신을 어떻게 지옥으로부터 지켜냈는 가를 돌아보면, 다시 일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거짓말은 때로 끝까지 구원이 되어줄 수 있다. 거짓말이 실제 일어난 일을 바꾸어줄 수는 없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를 바꾸어 줄 수는 있으니까. 거짓말 안에 진실한 사랑이 담겨있다면, 거짓말 안에 상대를 지켜내려는 열렬한 의지가 담겨있다면, 누군가의 악몽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의 공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놀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기하며 끝까지 거짓말을 지켜내는 귀도. 그의 애처로운 모습에서 진실한 사랑과 열렬한 의지를 본다. 숨바꼭질을 연기하며 끝까지 거짓말을 지켜내는 유치원 선생님에게서도 그와 같은 모양의 사랑과 의지를 본다.
(바이러스, 환경오염, 무분별한 콘텐츠, 사고, 재해, 성범죄, 학대와 폭력 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훈련이 필요한 이 시대의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거짓말쟁이 어른들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