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레사 Jun 23. 2023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전자책으로 연명하는 요즘 종이책이 무척 그립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장소에서 사는 어려움 중 하나는 최대한 짐을 늘리지 않겠노라 자꾸 다짐하게 된다는 점 아닐까.

‘살까 말까 고민되면 안 사기’

‘뭔가를 새로 들이게 되었다면 다른 무언가를 처분하기’

이것이 타지 생활의 기본 생활 자세. 자연환경이나 경제 상황을 고려해서, 혹은 단순한 삶의 태도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은 이 시대에, 나는 이런 걸 가지고 불만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더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서늘하게 인식되는 지금 내 삶의 임시성이 불안할 뿐이다. 무언가를 쌓아 놓아도 안전한 내 공간을, 그런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어딘가에 평생을 살기로 마음먹고 터를 잡는다면, 조용한 동네를 골라 나무가 내다 보이는 창문이 있는 집을 선택할 것이다. 계절 따라 모습을 바꿔가며 시간의 흐름을 눈치채게 해주는 나무가 있다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 책이 가득 꽂힌 튼튼한 책장과 커다란 책상,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안락한 1인용 리클라이너가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런 곳에서 책을 읽다 잠에 빠지고, 일기를 쓰다 꾸벅꾸벅 조는 상상을 한다. 친구들을 초대해 먹고 마시고 떠들며 보낸 주말을 뒤로하고, 빈 그릇을 치우는 상상을 한다. 달콤한 피곤이 밀려온다. 


상상은 자유지만 상상은 대부분 상상에 그치고 만다. 그렇기에 더욱 달콤한 것이겠지. 생활을 이어가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고 일은 시켜준다는 곳에 잘 붙어 있는 게 여러모로 덜 번거롭다. 아이들 교육 문제를 생각해도 아직은 이곳에 있는 편이 낫다는 결론.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멋쩍어진다. 핑계만 줄줄이 늘어놓은 것 같아서. 뭐든 하려고만 한다면야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고 안 하려고 하면 핑곗거리만 쌓이는 법이라던데. 어쨌든 핑계가 너무 타당해 보이는 연유로 내 꿈의 공간은 미래의 언젠가로 미뤄두기로 한다. 상상은 또다시 상상에 그치고….


하지만 그리 섭섭지 않다. 돌아보면 결혼 후 이사를 참 많이도 다녔다. 결혼 12년 차, 거쳐간 집이 무려 여섯 곳이다. 2년마다 이사를 다닌 셈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곳 싱가포르까지 오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더니, 맞는 말 같다. 그럭저럭 살아진다. 한국과의 적당한 거리감이 주는 의외의 해방감은 솔직히 좀 반갑기까지 하다. 한국에서 쓰던 가구로 채운 집에는 생각보다 빨리 정을 붙였고, 남편이 외출한 사이 혼자 독차지하는 책상은 내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 여기서 살 만하다.


살 만한 곳에서 찾아낸 작은 결핍, 임시성이라는 작은 불안. 나는 이 불안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불안을 안주 삼아 꿈의 공간이라는 욕망을 잔에 따라보는 일로 권태를 이겨내고 있는 것일지도.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존재’라고. 


얼마 전 영월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조상 대대로 400년째 영월의 옛 탄광촌에서 살고 있다는 한 아저씨를 만났다. 믿거나 말거나,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인상적이다. 한 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사는 삶은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세계를 지어 올릴까?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한 가지만 마음대로 짐작해 보기로 한다. 그 아저씨는 내가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은 욕망만큼, 어디로 좀 떠나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이다. 우연히 들른 여행객에게 '여기만 한 곳 없다'는 습관이 되어버린, 반쯤은 진심이 담긴 말을 건네면서 말이다.


지금의 공간을 ‘꿈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대체로 우리는 현재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어딘가를 그리워하거나 갈망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막상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고, 핑곗거리를 찾고, 이곳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자위하면서.

그렇게,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본 글은 2W 매거진 35호에 실렸습니다.

*사진 출처: 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이들에게는 때로 거짓말쟁이 어른이 필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