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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월경

by 테레사

내가 열다섯 살이었던 해에, 내가 다니던 교회 학생부는 동해로 수련회를 떠났다. 이박 삼일 정도의 짧은 일정 중에 바닷가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바다에서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았다.


천로역정이라는 고되고 긴 코스를 돌고 도착한 마지막 장소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바닷가였다. 땡볕 아래에서 오래 걷고 온 터라 우리는 모두 피로와 땀에 절어있었다. 바다는 그런 몰골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를 두 팔 벌려 반겨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다로 뛰어든 십 대 아이들은 서로에게 물을 튀기다 그것이 지겨워질 때쯤 방심하고 있는 누군가를 번쩍 들어 올려 바닷속에 풍덩 던져 넣었다. 무섭다고 꺅꺅 거리는 아이들은 믿을만해 보이는 다른 아이의 팔을 잡거나 목을 감쌌고,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책임지게 된 아이들은 제법 늠름하게 파도를 버텼다.


물에서 빠져나와 친구들 노는 양을 지켜보고 있을 때, 전도사님이 "찾았다!"라고 소리치며 무언가를 바닷속에서 건져 올렸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 바닷속에서 무언갈 찾는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이들이 "찾았다!"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고, 우리 모두의 시선은 전도사님의 손으로 쏠렸다. 전도사님 손에는 생리대가 들려 있었다. 순수하게 새하얀 생리대. 뒤늦게 그 물건의 정체를 알아챈 전도사님은 서둘러 손을 바닷물 속으로 담갔다. 바다는 생리대를 삼킨 채 파도쳤다.


한 번도 생리대를 사용해 본 적도, 사용할 일도 없을 젊은 남자 전도사님이, 십 대 아이들 앞에서 생리대를 들고 귀한 산삼이라도 찾은 양 큰 소리를 외치고 서있었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몇 초간 어색한 침묵과 난처한 표정이 바닷가를 채웠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한 건 예수님이 아니라 파도였다. 파도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밀려왔고.... 유난히 확성되어 들리는 그 소리를 이불 삼아 우리는 그 사건을 덮고 하던 놀이로 되돌아갔다.


생리대는 어쩌다 거기에 있었을까. 지금이었다면 바닷가에 전 세계 쓰레기가 밀려드는 게 예삿일이라, 그것도 어디선가 밀려온 쓰레기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곳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누군가의 옷에서 빠져나온 것일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생리 중이지만 바다에는 꼭 들어가고 싶었던 누군가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그때의 우리는 탐폰을 몰랐다). 당사자는 힘줄이 튀어나온 젊은 남자의 팔 끝에 걸린 자신의 생리대를 보았을까? 그랬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그냥 엄청 웃기다고, 웃겨서 죽겠다고 생각했기를 바란다. 혼자만 아는 비밀을 꽉 움쳐 쥐고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표정을 얼굴에 걸고 있었을지라도.


그러는 한편 나는 새하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리대에 피가 묻어 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피가 애초에 묻어있지 않았던 건지, 파도가 씻겨낸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잿빛 바다에서 마주친 새하얀 생리대는 뜬금없이 순수하고 대담했다. 그것은 한낱 역겹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일회용품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생리 주기를 조절하기 위해 피임약을 먹고 있었다. 며칠간 이어지는 단체 생활 중에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정말 번거로운 일이고, 혹여나 새기라도 하면 아주 난감해질 테니까.

“엄마. 나 수련회 기간이랑 생리주기랑 딱 겹치는데, 그때 생리 안 하면 좋겠어.”

“그래? 그럼 약을 먹어볼래?”

지금 돌아보면 엄마 혼자 가도 됐을 약국에 엄마는 굳이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건 수치심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피 흘리는 몸에 대한 수치. 임신 가능한 몸에 대한 수치. 여자 몸에 대한 수치. 약국에 가까워질수록 내 몸은 점점 굳어갔고 약사 앞에서 엄마가 ‘생리’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에는 수치심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나를 덮쳤다.


그렇게 용기를 짜내어 구한 피임약은 조용히 숨겨가며 삼켰다. 생리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생리대도 응당 조용히 숨겨가며 사용해야 하는 거라고. 그런데 그런 생리대가, 만인 앞에, 그것도 쨍한 바닷가에서 뜻밖의 해방을 맞은 것이다. 피임약을 먹던 소녀는 저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다는데서 오는 안도감이랄까, 다른 어떤 여자와 달리 여성의 생리현상을 숨기는데 더 능숙했다는데서 오는 우월감이랄까, 아무튼 그런 말도 안 되는 자긍심을 느꼈다. 그건 사실, 약국에서 짜낸 용기에 대한 보상에 더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수련회에서 돌아온 뒤로도, 높이 들어 올려진 새하얀 생리대가 종종 떠올랐다. 교회 밖 친구들에게 ‘야야, 들어봐.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말하며 깔깔 웃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는 수치심을 잊어갔다. 생리대도 생리도 피임약도 별 것 아닌 게 되어갔다. 한 번 공개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고, 그 어떤 충격적인 얘기도 자꾸 떠들다 보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때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지금에야 알 것 같다. 그때 바닷가 생리대가 드러낸 진실은 생리하는 몸이 아니었다는 것을. 진짜 진실은 숨기고 감추고 침묵해야 하는 몸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때의 어린 나에게, 세상의 모든 여자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소녀야, 너는 너의 몸 때문에 수치를 느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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