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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Apr 04. 2024

엄마, 우리는 왜 싱가포르에 사는 거예요?

어쩌다 보니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나오니 어느새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친정 식구들이 승합차에 짐을 싣고 작별인사를 한 뒤 몸도 실었다. 문이 닫히고, 우리는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훌쩍거리던 레아가 대성통곡을 시작한 건 그때였다.

"엄마, 왜 우리는 같이 못 가는 거예요?"

헤어짐이 아쉬움을 넘어 슬픔으로 물들었다. 엉엉 우는 아이의 얼굴을 보니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우리 레아. 할머니, 할아버지, 하준이 오빠네랑 같이 한국에 가고 싶구나. 엄마도 같이 가고 싶다. 그래서 엄마도 슬프다. 그런데 우리 집은 싱가포르에 있잖아. 그래서 같이 갈 수가 없어."

내 말이 끝나자 아이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왜 싱가포르에 사는 거예요?"

나는 아이를 꼭 안았다. 아이로부터 무언가를 줬다 빼앗은 것만 같아서 미안했다. 조부모와 삼촌, 숙모, 사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이렇게나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울다 보니 엄마 아빠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게 떠올라서 더 눈물이 났다. 왜 소중한 시간은 다 지나고 나서야 더 절절히 실감되는 걸까.


   아빠 칠순을 맞아 간 푸켓 여행이었다. 부모님과 오빠네 부부, 두 조카 모두 어렵게 시간을 맞췄다. 오랜만에 완전체로 모여 즐기는 느긋한 휴가. 친정식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게 참 편안했다. 같은 또래인 조카들과 우리 집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바다에서, 수영장에서, 워터파크에서, 숙소에서, 식당에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잘 놀다가 일정상 친정식구가 우리 보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었다. 촘촘한 추억을 남기고 떠나는 가족의 뒷모습을 보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더 눈물겨웠다.


   '우리는 왜 싱가포르에 사는 거냐'는 아이의 질문은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두어 번 반복되었다. 나는 '아빠 일' 때문이라고 답했고, 남편은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둘 다 틀린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아빠 일'때문이라는 대답은 남편이 모든 책임을 짊어진 것 같아 불편하다고 했다. 발령이 강제사항은 아니었고, 여러 상황(특히 전셋값!)을 고려해 본 뒤 내린 선택이었기 때문에 남편의 억울함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대답은 내가 불편했다. 당사자인 아이들이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결국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자 이곳에 왔다는 답변으로 합의를 봤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대답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누려오던 조부모님의 사랑과 바꿀 만큼 ‘새로운 경험’이란게 설득력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여기에 살게 된 진짜 이유는 '어쩌다 보니' 아닐까? 인생이라는 건 문득 정신 차려보니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의 연속 아니었던가?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 만남의 우연에 수정과 착상의 우연이 겹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듯, 전셋값 상승이라는 우연에 발령 제안이라는 우연이 겹쳐 우리는 싱가포르로 이주한 것이다. 무언가에 작정하고 달려드는 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은 나라서, 이런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삶은 의지나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다고.


   그곳이 어디든, 부모와 함께 사는 것만이 의심의 여지없는 삶의 기본값이었던 아이가 '왜?'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은 희소식이다.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의미이니까. 한국도 프랑스도 아닌 제3의 나라에서 양가 친척들과 똑 떨어진 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다른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연이 우리를 데리고 온 곳에서 꽃 피우며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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