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함구증
말이 너무 많아서 가끔 조용히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딸아이가 선택적 함구증 증상을 보인 시기가 있다.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말은 또래 아이를 둔 이웃에게서 들어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집 아이가 우리 딸이 겪었던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보여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아, 그때 그게 선택적 함구증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딸아이는 유치원에 입학한 후 1년간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개구쟁이의 모습을 잃지 않았지만, 유치원에서 뿐 아니라 가족 외의 타인에게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초반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껏 자기표현이 확실했고 친구들하고도 잘 소통하던 아이었기에, 곧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 해는 싱가포르로 이주한 해이기도 했고, 프랑스 유치원으로 등원하는 첫 해이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환경적, 언어적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말씀으론 수업 참여도는 높다고 했다. 주어진 활동을 지시에 따라 꼼꼼하게 수행하고, 책을 읽어 줄 때도 집중해서 잘 듣는다고. 그렇지 않아도 아이는 유치원 가는 걸 좋아했다. 하루 종일 묵언 수행을 하면서도 말이다. 수많은 CCK를 경험해 본 노련한 선생님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 부부를 안심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나아질 거라는 말씀과 함께. 하지만 1년은 내게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급함과 느긋함 사이를, 안타까움과 덤덤함 사이를 헤맸다.
등원한 지 6개월이 지나도 아이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자기표현을 안 하니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수밖에. 부모의 개입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어 딸아이가 가장 좋다고 하는 반 친구 하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는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었다. 딸아이가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내심 기대했다. 집이라는 편안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친구와 단 둘이 있으면 혹시 입을 열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아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와락 껴안는다거나, 손을 잡아 끄는 식으로 마음과 의사를 표현할 뿐이었다. 말 못 하는 2세 아기나 보일 법한 그 행동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처음 목격하는 딸의 서투른 사회성이 낯설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대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불편했을 친구에게 대신 사과를 하고 딸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 그렇게 하면 친구가 불편해해. 그만."
"손을 잡아 끄는 대신, 말로 하면 어떨까?"
주의를 줄수록, 내 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아이를 이용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워졌다. 나는 그 친구를 두 번 다시 초대하지 못했다.
그렇게 찝찝한 상태로 한 학년을 마치고 프랑스로 한 달간의 휴가를 떠났다. 아이는 휴가 기간 동안 여러 면에서 자신감이 붙었다. 다정한 할머니에게 조차 쭈뼛대던 아이가 며칠 만에 마음의 빗장을 풀었고, 1년 만에 만난 친구와의 어색함도 금방 극복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심을 주는 시댁 식구들 덕이 컸다. 대가족이 아이에게 주는 좋은 영향을 그때 체감했다. 친가 식구들과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낯선 사람에게 응답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몇 달 후에 있었던 학부모 상담에서, 선생님은 대뜸 축하를 전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면서. 너무 조그맣게 말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말을 하기는 한다고.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용기를 낸 아이가, 조금 더 강해진 아이가 기특했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면, 아이는 본인의 때에 맞춰 조금씩 나아간다. 모두의 믿음과 바람대로, 한 번 내기 시작한 아이의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그러자 친구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한 번도 플레이 데이트나 생일파티에 초대된 적 없었던 아이의 주말이 바빠졌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기념했던 아이의 생일을 그 해에는 북적북적한 파티를 열어 치렀다. 아이의 선택적 함구증이 해피엔딩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아이가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을 때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는, 책에서 찾은 문구가 있어 내 멋대로 번역해 남겨본다. 더 정확한 내용은 원문을 참고.
"너는 가장자리에 서서 입을 다문채 듣는다. 주로 배우기 위해 듣기만 할 뿐, 그 일에 오롯이 참여할 수는 없다. 어떤 일에서건 주도자로서가 아니라 오직 소심한 도우미로서만 겨우 참여한다. 네가 뭘 하든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기를,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너는 항상 두 번 체크하며 확인한다."
You stand at the edge, and you shut up and listen, mostly to learn, but you can’t participate. You only sort of participate - not as an initiator, but as a weak supporter in whatever goes on - hoping that whatever you do is right and flies okay. you're always double-checking and making sure.
p.174,『Third Culture Kids: The Experience of Growing Up Among Worlds』, by David C. Pollock, Ruth E. Van Reken, Michael V. Pollock, Nicholas Brealey Publis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