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야
아주 오래전 TV에서 6개 국어인가, 7개 국어인가를 하는 러시아 어린이를 본 적이 있다. 그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방법은 과외활동을 외국어로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요리 교실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음악은 중국어로 배우는 식.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 보다도, 언어를 언어 자체로 배우지 않고 다른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혀간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언어를 배우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방법을 우리 집 아이들 한국어 교육에 적용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그냥 한국인 선생님을 찾아다닌다는 뜻이다. 아이가 한국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닐 때에는 언어나 문화 노출이 균형 잡혀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로 소통하는 일상생활과, 프랑스 선생님과 프랑스어로 생활하는 학교 생활. 한프(한국-프랑스) 가정인 우리에게 이 균형 잡힌 세팅은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제3 국에 와보니 사정이 다르다. 프랑스 학교를 다니니까 프랑스 쪽은 결핍이 적지만 한국 쪽은 아니다. 한국어 실력은 차치하더라도, 따로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한국과의 유대감은 점차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 한국인을 만나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환경을 자주 제공해 줄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게 말이 쉽지 의도적으로 상황을 만들어 주기가 간단치 않다. 그래서 나는 상황을 끼워 맞추는 편을 선택했다.
어떻게? 미술 학원을 다니고 싶다는 아이에게 한국인 미술 선생님을 찾아준다. 수영을 배우고 싶다는 아이에게 한국인 수영 선생님을 붙여준다. 양궁에 관심을 갖는 아이에게 한국인 코치님을 붙여준다. 결국 다 사교육이다. 사교육 말고 사교모임을 만들자니 아이들 연령이나 성향에 따른 케미가 괜찮은 짝을 만나기가 무척 어렵다. 거기에 부모 간의 조화도 신경 써야 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있다. 무엇보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사교육이다. 어차피 할 예체능 사교육, 한국인 선생님께 배우면 우리 입장에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 된다.
내 속에 이런 흑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한국인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운이 좋았던 걸까? 나와 아이들은 한국인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다. 한국에서 만났던 어린이집 선생님, 놀이 선생님, 미술 선생님, 수영 선생님 심지어 의사 선생님까지 모두가 너무너무 좋으셨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좋아하셨고, 전문적이셨고, 마음까지 따뜻했다. 이런 경험이 쌓여 있으니 내가 눈을 반짝이며 한국인 선생님을 찾을 수밖에.
현재 우리 집 아이들은 미술과 양궁 수업을 듣고 있다. 미술은 특강식으로 가끔 그러나 꾸준히 가고, 양궁은 큰 아이만 매주 레슨을 받는다. 마치 우리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선생님들은 적시적소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역시나... 탁월하다. 자기 분야에 열정이 있고, 아이들을 잘 지도해 주시며, 나를 대하는 매너에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해외에서 이런 한국인을 알게 되면 잘한 거 하나 없으면서 자랑스럽고, 도와준 거 하나 없으면서 뿌듯하다. 이방인 신분으로 자기 자리를 단단히 만들어가고 있는 그 에너지가 내게 건강한 자극을 준다. 단단하게 서 있는 그들의 어깨에 몰래 기대어 든든함을 느낀다. 용기를 얻는다. 어떤 성실한 삶은 타인의 삶을 구하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타국에서 만나니 더 반가운 한국인 선생님들. 그들 덕분에 우리 집 아이들은 한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더 자주 감각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동시에 한국의 감성을 조금씩 흡수해 간다. 선생님과 엄마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통해 한국적 정서를 읽어낸다.
이보다 더 가심비 훌륭한 사교육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