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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Mar 28. 2024

우리 가족 연간 행사

차곡차곡 쌓이는 우리들의 추억

  어려서부터 나는 명절을 좋아했다. 큰 집인 우리 집으로 친척들이 모여드는 게 좋았고, 모두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았다. 엄마와 작은 어머니들을 도와 전을 부치고, 상을 차리는 일도 즐거웠다. 밤이 되면 술 취한 어른들이 언쟁을 벌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일을 집어먹으며 고스톱을 치는 풍경이 내게는 그 자체로 잔치였다. 고스톱 조기교육을 받은 나는 얼마간 크고 난 뒤에는 어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돈을 잃거나 따고 광을 팔았다. 그때는 며느리의 고충 같은 것을 몰랐다. 내가 행복하니까,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오늘날 친정집 명절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이제 명절은 직계 가족만 모이는 단출한 잔치가 되었다. 그마저도 우리 가족은 해외 생활을 하고 있어서, 부모님과 오빠네 네 식구만 뿐이다. 모쪼록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한 명절을 보내기를 먼 곳에서 바란다.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 때문인지 나는 약소하게라도 명절의 의식(式)을 갖추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때에 따라 특정한 날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날 꼭 챙겨 먹어야 하는 특별한 음식을 먹다 보면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 변주된다. 그래, 순전히 그것 때문이다. 나는 명절이 맛있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나 명절은 음식과 연결된다. 이제는 퇴색해 가는 정월 대보름이나 동지 같은 명절들이 내게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은 다 엄마가 챙겨주셨던 음식 덕분이다. 엄마는 대보름이 되면 오곡밥을 짓고 나물반찬을 만들었다. 시장에서 부럼(땅콩이나 날밤 같은 견과류)을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곡밥이나 나물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오독오독 씹어먹던 날밤만은 끊임없이 들어갔다. 동지에는 할머니나 엄마가 손수 끓인 팥죽에 설탕을 넣어 먹었다. 그 따끈 달콤 든든한 한 그릇이 그립다.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우리 집 CCK들은 어떤 명절과 음식들을 기억하게 될까? 한국과 프랑스의 명절, 그리고 그 외 기타 이벤트가 짬뽕된 우리 가족 연간 행사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생각보다 행사가 많아서 생일은 생략했다.


1월. 주현절(L'épiphanie)

관람차 모양 페브

크리스마스로부터 12일째 되는 날, 1월 6일은 주현절이다. 프랑스어로는 에피파니라고 부르는 이 날, 프랑스에서는 갈레뜨 데 루와(galette des rois)라는 아몬드 필링이 가득한 겉바속촉 달콤한 파이를 먹는다. 파이 안에는 페브(fève)라고 부르는 작은 도자기 인형이 들어 있는데, 운 좋게 이 도자기 인형이 들어 있는 조각을 먹게 되는 사람은 그날의 왕이 된다.

한국이나 싱가포르에서도 프렌치 스타일을 표방하는 제과점에서는 연초 시즌 상품으로 갈레뜨 데 루아를 판매한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마트에는 간단하게 오븐에 넣고 굽기만 하면 완성되는 프랑스산 냉동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맛도 괜찮고 가격도 착해서, 우리 집은 보통 이 걀레뜨 데 루아를 먹는다. 네 가족이 먹기에는 칼로리 부담이 큰 관계로, 비슷한 또래의 어린이가 있는 가족을 초대하거나 초대받아 함께 나누어 먹는다. 티타임에 만나니 손님 접대에 부담도 없고, 누가 왕에 당첨될지 궁금해하는 재미도 쏠쏠해서 주현절은 모임 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2월. 설날(Le nouvel an lunaire)

한국에서 사골국물로 끓였던, 우리 집 어린이들을 위한 떡국.

음력 1월 1일 설날에는 떡국을 끓여 먹는다.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라떼'이야기는 생략한다. 한국도 이제는 나이를 만으로 세는 시대. 떡국이 아니라 생일 케이크를 먹어야 한 살 더 먹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적에는, 정육점에서 직접 고아 파는 사골 국물에 떡국을 끓이곤 했지만, 해외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멸치 다시마 육수에 끓인 깔끔한 떡국을 먹는다. 

떡국만큼 중요한 것은 김치다. 떡국을 김치 없이 먹으면 떡국이 아니니까(?). 설날이 오기 전에, 떡국 떡만큼이나 김치를 미리 주문해 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만 3세 아이의 공손한 세배

물론 세배도 빠트릴 수 없다. 어렸을 적 설날이 되면 세배 시간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뱃돈을 받으면 어떤 장난감을 살까 고민하던 순간들도. 사촌들과 나이 순서대로 서서 공손하게 몸을 접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를 올리면 은행에서 바꿔온 빳빳한 새 지폐를 건네주시던 어른들. 가난하고 바쁜 와중에도 조카들의 용돈을 준비하셨을 마음들이 지금껏 감사하다. 이제 슬슬 돈 맛을 알아가는 첫째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화상전화로 전하는 세배에도 적극적이다. 둘째 아이는 부끄럽다며 세배를 거절한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저리도 잘하던 세배를...


3월. 부활절(Pâques)

친구 집에 초대받은 아이 손에 들려 보냈던 부활절 초콜릿 바구니. 

프랑스의 명절은 가톨릭에 기반한다. 부활절도 마찬가지.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주현절도, 부활절도, 크리스마스도 종교적 의미는 크게 없다. 부활절은 그저 에그 헌팅(egg hunting)을 하는 날이다. 아이들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숨겨놓은 달걀모양 초콜릿을 찾는, 보물찾기 하는 날. 한국에 있을 적에는 적당한 공원에 모여 에그 헌팅을 한 뒤, 피크닉을 즐겼다. 싱가포르에서는 높은 기온에 초콜릿이 다 녹아 버리기 때문에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식으로라도 에그 헌팅을 꼭 해내고 만다. 이번 주말에도 부활절을 맞아 아이들 친구 가족들과 에그 헌팅을 하기로 했다.



5월. 어린이날(La fête des enfants)

방정환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어린이들 특별 대우 해주는 날, 5월 5일. 내게는 어린이날 노래, 선물, 나들이, 여기저기서 열렸던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 따스한 날씨로 기억되는 기분 좋은 날이다. 어린이날이 공식적인 공휴일로 지정된 나라가 많지 않아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날 만큼은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놀이를 하도록 한다. 선물도 직접 고를 수 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는 이 특별한 날을 아이들이 성인이 돼서도 기억하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할머니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할머니가 된다면 손자 손녀의 어린이날도 꼭 챙겨주고 싶다. 


9월. 추석(Chuseok)

반찬가게에서 주문한 모듬전과, 추석을 맞아 한복을 입고 포즈를 잡아보는 두 어린이

음력 8월 15일 추석에는 반찬가게 음식들로 푸짐한 한식 명절상을 차린다. 송편, 전, 나물반찬, 도토리묵무침, 몇 종류의 김치.... 거기에 불고기나 잡채 같은 최소한 한 두 가지는 요리는 직접 한다. 그래야 더 명절 치르는 기분이 난다. 지인 가족과 함께하면 더 좋고.

작년까지만 해도 추석에 아이들에게 한복을 입혔는데, 이제는 다 작아져 버렸다. 몇 번 입지 못하고 작아져 버리는 한복을 다시 구매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다.


10월. 핼러윈(Halloween)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위해 급조한 핼러윈 키즈메뉴

우리 부부가 어렸을 적에는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핼러윈을 기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기억 속에 핼러윈의 추억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낳은 뒤로는 핼러윈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10월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집안을 핼러윈 소품으로 장식하고, 핼러윈 파티에 갈 때 어떤 코스튬을 입을지 고른다. 남편과 나는 언젠가 당근 마켓에서 산 저주 토끼 가면과 저주 곰돌이 가면을 몇 년째 우려먹는 중이다. 

핼러윈 파티에 참석한 아이들은 해가진 뒤의 어두컴컴한 공원에서 사탕을 받으러 돌아다니거나, 코스튬을 입고 모여든 친구들과 함께 핼로윈 테마로 구성된 이런저런 게임을 한다. 귀신이나 유령과 같이 평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축제의 날. 이 공포와 재미의 모순적 조합에 아이들은 열광한다. 약간의 으스스함과 달콤한 사탕, 특별한 코스튬...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12월. 크리스마스(Noël)

귀여운 크리스마스 케이크.

크리스마스는 우리 가족의 가장 큰 연중행사다. 아이들에게는 산타라는 신비로운 존재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는 연말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마음이 들뜨는 게 한 몫한다. 12월이 다가오면,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고 어떤 어드벤트 캘린더를 준비할지 고민한다. 아이들을 위한 즐거운 고민이다. 사실 우리 부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일매일 초콜릿이나 레고 블록을 열어보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마음도 동심으로 돌아간다. 몰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일도 즐겁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식전주-전식-메인-치즈-후식 순서를 지키는 프랑스식 코스 요리를 저녁으로 먹는다. 식재료 수급을 위해 몇 주 전부터 나름 치밀하게 계획한다. 가장 신경 쓰는 것은 후식이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적에는 보기에 예쁜 케이크를 골랐다면, 이제는 클래식한 부쉬 드 노엘(Bûche de noël)을 선호한다. 대망의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산타가 두고 간 선물이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여있다. 


   위의 연간 행사들은 해를 거듭하면서 우리만의 전통을 만들어주고 있다. 집 밖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어떤 하루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기념일이 된다. 명절 음식이 간소화되고, 가족 모임이 지인 모임이 되는 등 어딘가 조금씩 오리지널의 느낌이 나지는 않지만,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그게 오히려 우리를 더욱 '우리'스럽게 만들어준다.


   한국도 프랑스도 아닌 제3 국에 살다 보면 모두로부터 우리 가족만 뚝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꼭 붙들고 있다는 실감에 든든해지기도 한다. 그런 실감은 우리만의 이벤트를 챙기고, 우리만의 전통을 이어갈 때 더 또렷해진다. 이런 끈끈한 유대감이 아이들의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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