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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Jun 08. 2020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김밥 어때?

만들기는 안 간단한 김밥

   엄마가 초등학생 때 말이야,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눈을 뜨는 아침이 드물게 있었어. 그런 아침이면 잠에서 덜 깬 머리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내느라 애를 썼지. 그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둘 중 하나였거든. 소풍을 가는 날이거나, 운동회가 열리는 날. 그런데 너도 알지?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정신이 없다는 거. 그러다 마침내 그 날이 무슨 날인지를 알아내고 나면 몸이 가뿐하게 이불 밖으로 튕겨져 나왔어. 그야, 신이 나서 그랬지.


   참기름 냄새의 근원지인 주방으로 달려가 보면 갖가지 김밥 재료에 둘러싸여 있는 엄마의 엄마가, 그러니까 네 할머니가 거기에 있었어. 할머니는 비좁은 조리대 대신 바닥에 앉아 김밥을 말고 있었지. 그때야 주방이 작아서 그랬다고 하지만, 요즘에도 시간이 좀 걸리는 음식을 만들 때면 바닥이 편하다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시는 걸 보면, 익숙해져 버린 방식이란 것은 쉽게 바꾸기가 어려운 건가 봐.


   짧은 다리가 달린 나무 도마에는 대나무 김발이 놓여 있었고, 김밥은 그 위에서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어. 까만 김 위에 하얀 밥을 손가락 끝으로 펼쳐 깔고 나면 예의 그 탐스러운 컬러를 자랑하는 속 재료들이 폭신한 밥풀 위에 제자리를 찾아갔지. 그제야 한쪽 끝부터 조심조심 돌돌 말리던 김밥. 할머니는 그런 김밥을 대나무 김발로 감싸 그러쥐고는 꾹꾹 눌러가며 손 안에서 한 바퀴 더 굴리곤 했어. 그 일을 끝내면 김발을 두르르 풀어냈지. 까만 옷을 차려입은 김밥이 도마 위로 톡, 떨어지던 순간이 비디오처럼 엄마 머릿속에 남아있네. 그때는 그럴 줄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엄마는 할머니를 돕는답시고 참기름 바르는 일을 자처했어. 기분 좋게 엄마를 깨우던, 그 향긋한 참기름을 김밥 위에 슥슥 발랐지. 그때는 참기름을 지금처럼 온라인 몰에서 주문하지 않았어. 어디선가 구한 참깨를 방앗간에 들고 가서 기계에 넣어 직접 짜내서 썼단다. 신기하지? 사실 아직도 할머니는 그렇게 만든 참기름을 쓰셔. 이게 바로 할머니 집밥 맛의 비밀! 엄마가 해준 밥이 덜 맛있는 게, 비단 요리 실력 때문만은 아니라고.


   엄마는 참기름 냄새가 참 좋아. 어린 시절 설레던 그 아침들을 떠오르게 하거든. 그러고 보니 궁금해지네. 너에겐 어떤 냄새가 가슴에 남을지. 어떤 냄새가 너의 이 시절을 떠오르게 할지.


   다시 그날 아침에 대한 얘기를 더 해줄까? 김밥들은 꾸준히, 차곡차곡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갔어. 그 정도면 충분해 보였는데도 할머니의 김밥말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보나 마나 오늘 아침도 김밥, 점심도 김밥, 저녁도 김밥이구나 싶었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많아도 너무 많아 보이던 김밥들. 그 많던 김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집 김밥은 아랫집과 윗집으로, 옆집과 건넛집으로 나눠졌던 것 같아. 할머니가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서 김밥 파티를 열었을 수도 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엄마는 알 수 있어. 왜냐하면, 엄마도 그렇거든. 엄마도 때때로 반찬을 나누고, 빵과 케이크를 나누거든. 기왕 만드는 거 조금 더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눠 먹는 거지. 물론 엄마가 음식을 받을 때도 있지. 지난겨울에 네가 잘 먹었던 사과잼 기억하지? 그거 미라이모가 만들어 준거였잖아. 사소해 보이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야. 시간과 정성이 깃든 음식을 주고받는 일은.


   그런데 있잖아. 참기름 냄새에 눈을 뜨는 아침은 언젠가부터 찾아오지 않았어. 할머니가 김밥 싸기를 그만둬버렸거든. 바로 김밥 전문점의 등장 때문이었지. 그때부터 소풍날이 되면 엄마 손에는 도시락 통 대신 천 원짜리 지폐가 쥐어지기 시작했단다. 어딘가 휑한 느낌이었어. 이런 날이면 으레 분주했을 주방이 조용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참기름 냄새가 풍겨오지 않아서.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얼마나 솔깃하고 반가운 소식이었을까? 단 돈 천 원이면 된다니. 김밥을 싸기 위해 들이는(1. 나가서 장을 보고 2. 여러 가지 재료를 다듬어 볶거나 데친 다음  3. 다 된 밥에 간을 하고 4. 김으로 풀리지 않게 잘 말아 5. 먹기 좋게 썰어낸 뒤 6. 도시락 통에 차곡차곡 담고 7. 초토화된 주방을 정리하는) 긴 노동의 시간이- 천 원이면 해결된다니! 먹기는 더없이 간편하지만 만들기는 그렇게 복잡할 수 없는 김밥. 할머니는 그런 김밥말기에서 해방되었던 거야. 김밥 전문점 만세!

     

   단정히 썰려 도시락 통에 담긴 김밥은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그 자체로 참 예뻐. 한 입에 들어가는 귀여운 크기, 동글동글한 모양, 알록달록한 색깔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엄마는 특히 그 동그란 모양이 좋더라. 서로 다른 재료들을 동그랗게 안고 있는 그 모양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김밥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김밥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들고.

      

   그래서 말인데,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김밥 어때? 저 아래 김밥집 괜찮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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