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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May 05. 2020

다행이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라서

    유난히 연말 기분이 나지 않는 지난 12월이었다. 집에 다소 유난스러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썰렁한 마음은 달래지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한 해 동안 크게 기억에 남을만한 사건 사고가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새해에 일어날만한 그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아서일까? 아마 둘 다 때문이겠지. 오늘은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 같을, 다소 잔잔한 날들을 사는 중이었으니까.     


   손님을 초대하면 연말 기분이 좀 날까 싶어 파티를 열었다. 2019년의 마지막 날, 평소 가깝게 지내는 큰 아이 친구 가족을 초대했다. 고맙게도 같은 또래인 꼬마들이 잘 어울려 놀아서, 식탁에 둘러앉은 어른들은 여유롭게 먹고 마시고 떠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날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가.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푸념은 분명 빠지지 않았을 테고, 새해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해 바뀌는 게 실감도 나지 않는 마당에 새해 계획이라니. 머릿속을 잠시라도 스쳐간 적 없는 그 주제 앞에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말을 내뱉은 기억이 난다. 영화 <기생충>에 나온 바로 그 말을. 마치 내 무계획이 계획적인 것이라도 되는 양.


   손님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자 덩치 큰 정적이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부부는 갑작스러운 고요에 적응하며 노곤한 몸을 애써 움직였다. 식탁과 주방을 정리하고 나니 잠이 몰려왔지만, 이대로 잠들기엔 어딘가 찜찜했다. 오늘은 12월 31일이니까.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만, 새해의 시작을 목도하지 않고 잠을 잔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 같았다.     


   축제 분위기를 느끼며 카운트다운을 하고자 TV 전원을 켰다. 남편은 끊임없이 채널을 돌렸다. 타종행사 중계만은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보다는 까만 밤하늘을 무대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를 시청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화면을 바라보며, 채널이 이렇게나 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 이 모든 것이 무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메뉴가 없다는 식당에 먹을 만한 메뉴도 없듯이, 볼만한 채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피하고 싶던 타종행사 중계에 채널을 고정했다. 보신각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달뜬 상태로 외쳤다. 10! 9! 8! 7! 6! 5! 4! 3! 2! 1!!!! 대-앵- 첫 종소리가 울렸다.      


   매년 느끼는 거지만 카운트다운 끝에 울리는 종소리는 참 김 빠진다. 10에서 1로 향해갈수록 고조되던 흥분과 설렘은 우렁찬 소리로 폭발되어야 마땅한 것을. 눈치 없는 종은 예의 그 고상하고 차분한 소리를 울리며 ‘유난들 떨지 말고 진정들 하시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고작 이런 소리를 듣자고 한겨울 추위를 견뎌가며 몇 시간을 길 가에 서 있을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해 수많은 인파가 모이는 것을 보면 참 의아하다. 종소리에 담긴 어떤 역사적 의미나 중요성을 내가 미처 몰라서 하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다.     


   2019년에 뜨던 그 태양이 또다시 떠올랐다. 숫자 2와 0이 차례차례 반복되어 놓여있는 새 달력을 보며 조금 더 잘 정돈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보지만, 아이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듯하다. 아침부터 집안 곳곳을 누비며 그들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느라 바쁜 아이들. 방과 거실은 어느새 책과 장난감들로 어지럽혀져 있고 식탁은 빵 부스러기와 우유 얼룩으로 금세 난장판이 된다. 새해 아침이라지만 어째 어제와 똑같은 평범한 하루가 반복될 것 같은 예감. 끊임없이 종알대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있자니 예감은 확신이 된다.    

  

   하기야, 새해가 뭐 별건가. 달력이란 과거 수메르인이었는지, 이집트인이었는지, 아무튼 지혜로웠던 누군가가 창안해 낸 규칙일 뿐, 달력이 넘어간다고 우리의 일상에도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각자 개별적인 인생의 모멘트(입학과 졸업, 만남과 이별, 결혼과 출산, 입사와 퇴사 같은)를 통과하며 무언가를 마무리하거나 새로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달력 안에 담긴 규칙이 쓸모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루와 일주일과 한 달 그리고 한 해로 이루어진 틀 안에서, 우리는 안정감과 리듬감을 느끼며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끝없이 더해지기만 하는 시간을 산다고 상상하면 숨이 막히는 것만 같다.


   아이들이 먹다 남긴 빵으로 대충 아침을 때우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마주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상황의 맥락을 함께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어서 참 다행이라고. 우리의 매일이 딱 오늘만 같으면 좋겠다고.

      

   그제야 지난밤 들었던 종소리가 좀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해가 바뀌는 것은 크게 흥분할 일이 아니다. 그래 봤자 괜히 더 허전하고 썰렁한 기분만 들뿐. 한 해 동안 수고했다며 서로의 등을 쓸어주고, 계속 잘해보자고 서로의 잔을 부딪치는 정도면 됐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2020년 연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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