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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Mar 09. 2021

환대와 홀대

우리는 어떤 어른일까

  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외출하기란 정말이지 번거로운 일이었다. 아이가 먹고 자는 스케쥴에 맞춰 동선을 짜야했고, 아이의 외출 준비를 돕자면 정작 나 자신은 단정하게 정돈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먹을 것이나 갈아입을 기저귀, 놀잇감 등을 챙겨 넣은 가방은 묵직했는데 아기는 이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다니면 허리에 무리가 왔고, 유아차에 아기를 태우고 나가면 길이 험하게 느껴졌다(실제로 우리나라에는 인도가 따로 없는 길이 많고, 인도가 있더라도 경사로에는 불법주정차 차량이 길을 막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기와 외출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불편함을 깊이 체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의 외출은 언제나 설렜다. 육아와 살림만으로 일상이 돌아가던 내게는 집이 곧 일터이기도 했기에, 집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주는 해방감이 좋았다. 산책길에 바라본 하늘이나 나무들, 마트에 나온 식재료를 보면서 계절을 느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친구를 만나면 회사 동료에게 느꼈던 종류의 유대감이 생겼고 무엇보다, 시간이 잘 갔다. 오만가지 자잘한 노동으로 이루어진 육아라는 일은 알고보니 ‘시간을 견디는’ 일이었고, 시간을 견뎌내는 데에는 외출만한 것이 없었다.  


  이 외에도 아이와의 외출을 설레게 만든 이유는 또 있었다. 그건 바로 사람들의 호의 때문이었는데, 아이 없이 다닐 때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순수한 색의 호의였다.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말랑해진 사람들은 작지만 따스한, 분명한 질감을 가진 친절을 베풀었다. 아이가 아직 먹지도 못하는 사탕이나 작은 놀잇감 등 무엇 하나라도 손에 쥐어주고 싶어하던 마음들, 아이를 향한 조건없는 칭찬과 축복의 말들, 상냥함이 가득 담긴 사랑스러운 목소리들, 그리고 미소들… 그 미소들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다. 거리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미소로 물들던 그 마법같은 순간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저쪽의 미소는 이쪽의 미소를 낳았고, 때로는 잔잔한 덕담을 낳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향한 호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선량한 태도를 가까이에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매일 보드라워졌다. 완전한 타인과의 찰라의 교류가 나의 하루를 망칠 수도 있지만, 행복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친절한 세상에서 자란다면, 아이가 기품있는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 다니는 나도 전보다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고.


   하지만 이런 호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맘충’이라는 말이 자주 들려오더니, ‘노키즈 존’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더이상 아이는 세상의 환대를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이의 엄마인 나는 벌레로 불렸다. 가뜩이나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감에 겨우 부여만 잡고 있던 자존감이 더욱 쪼그라 들었다. 어느 날인가 부터는 엉뚱한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엉뚱한 사람들은 바로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나와 같은 양육자들이었다. 내 기준대로 ‘무개념’한 양육자를 규정하고 이런 사람들을 마주치기를 수치로 여겼다. 같은 류의 사람으로 여겨지기 싫었다. ‘개념’있는 엄마가 되려고 스스로와 아이를 단속했고, 어쩔 수 없을 때는 합리화 했다. 외출이 점차 피곤해졌다.  


   그러다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지? 단지 아이라는 이유로, 아이와 동행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배척당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모두에게 묻고 싶어졌다. 당신은 아이인 적이 없었느냐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어딘가에서 거절당하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고.


   우리는 때로 큰 소리로 대화해서, 다른 사람의 초상권을 무시한 촬영 때문에, 길가에서 흡연을 해서, 이어폰 없이 음악을 들어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려서, 길을 비켜주지 않아서, 새치기를 해서, 심지어 단순히 쳐다봤다는 이유 등 기타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불쾌감을 느낀다. 아이가 울어서, 뛰어 다녀서, 소리를 질러서 불쾌해지는 만큼 어른들도 여러가지 이유로 아이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른들은 유독 아이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어른보다 느리고, 자제력이 부족한 어린 사람들을 여유있는 시선으로 바라봐주면 좋을텐데.


  일부 무책임하고 몰지각한 양육자들의 태도가 고쳐져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나도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그 문제적 태도와 행위를 지적할 일이지 특정집단, 그것도 아이들을 한데로 묶어 배척하는 것은 아이들 보기에 부끄러운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계속 된다면, 아이들이 공공예절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배울 기회를 잃은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어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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