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동네

by 테레사

역삼동 오피스텔.

장점: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구조.

단점: 주방이 너무 비좁음.

교통: 회사까지 걸어서 5분. 여기에 밑줄, 별표.

10년 전, 이렇게 메모를 해두었던 곳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운 좋게도 보증금은 물론 관리비까지 회사에서 부담하는 조건으로 얻은 집이었다. 비록 오피스텔이기는 하지만, 강남에 거주한다는 은근한 허영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여태 경기도에서 출발해 왕복 세 시간의 출퇴근길을 이어오던 내 일상에는 말 그대로 혁신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걸어서 단 5분이면 사무실에 다다를 수 있다니! 나 이제 8시 반에 기상해도 되는 거야? 이것이 바로 강남 (라이프) 스타일?


신혼부부가 으레 그렇듯 우리 부부도 요리하기를 즐겼다. 말도 안 되게 비좁은 주방에서 그렇게 뭘 자르고 지지고 볶았다. 맛이 없어도 괜찮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괜찮게 만드는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둘만의 집에서 저녁을 해 먹는 일상이라니. 꿈이 아니길 바랐을 뿐이다.

오피스로 가득한 그 동네는 주말이면 속이 텅 빈 유령 도시 같았다. 주로 직장인을 상대하는 식당과 상점들은 손님이 없으니 모두 문을 닫았다. 당연히 길거리를 오가는 차도 사람도 드물었다. 대체 이 건물에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할까?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집에 틀어박혀 있나? 주말만 되면 찾아오는 그 적막이 처음에는 평화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점차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 머물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월요일 출근시간이 되면 역삼동은 비로소 활기를 되찾았다. 점심시간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열었고 퇴근시간까지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붐볐다. 깜깜한 밤에는 온 동네가 은밀하게 분주했다. 너무 은밀해서 처음에는 눈치 채지 못했다. 창밖 거리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기 전까지는. 오피스텔 근처에는 다소 거칠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외제차가 많았다. 그 차 안에서는 아름답게 단장한 여자 두세 명이 쪼르르 내리거나 쪼르르 탔다. 바로 룸살롱 도우미들이었다. 더 늦은 밤이 되면 남녀가 둘씩 짝을 지어 바로 옆 모텔로 향하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창밖으로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은 정말 별로였다. 몰랐으면 더 좋았을 불미스러운 세상을 그때 알아버렸다.


역삼동에는 이렇게 손님이 없어서야 사업 유지가 되려나, 하는 걱정이 들 만큼 손님은 없는데 규모는 큰 미용실이 몇 개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남 걱정이었다(정신 차려, 네 걱정이나 해!). 한 번은 미용실 안에 입점되어있는 네일샵을 예약하고 퇴근 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손님으로 가득 찬 미용실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아, 여기는 저녁에 장사가 잘 되는 거였구나.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어째 이상했다. 어정쩡하게 걸어 들어가 네일아트 코너에 앉아 있자니 곧 분위기 파악이 됐다. 그곳은 룸살롱 도우미를 주 고객층으로 삼고 있는 미용실이었던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들어와 헤어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을 받고(그녀들은 실내에서 담배를 피웠다. 모든 자리에는 당연한 듯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거기로 직접 배달되어 오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 출근했다. 내가 우리 집 창밖으로 보았던, 운전기사가 딸린 외제차를 타고. 나는 무슨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언어, 태도, 외형, 원 스톱 시스템 (비용 지불은 종이 쿠폰으로 했다.)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떤 손님은 내 곁을 지나가다 한마디 하기도 했다. “어머~ 언니 손이 완전 아기 손 같다~!” 서비스직 특유의 상냥한 말투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나는 얼어 버렸다. 대체 뭐라고 대꾸해야 했을까?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색해서 무슨 정신으로 네일아트를 받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동네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어 졌다.


1년 뒤 회사의 주거비 지원이 완료되는 시점에 우리는 월세집을 얻어 이사했다. 회사까지 버스로 40분 정도 걸리는 동네였다.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좁은 빌라였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풍족했다. 단골 식당이 생겼고, 걷기 좋은 산책 코스를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인사 나눌 이웃이 생겼다. 그렇다. 역삼동에서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우리와 닮은 이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둘이 좋아 결혼했지만, 둘이서만 사는 세상은 시리다는 것을. 우리가 드디어 사람 사는 동네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1 여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