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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Sep 24. 2021

흔하디 흔한 러브스토리 - 2

나는 어쩌다 프랑스 남자를 만났나

그냥 한번 만나나 보자며 나갔던 첫 데이트에서 그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취향에 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셔츠 차림의 그가 평소보다 더 멋져 보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오며 가며 눈여겨보던 식당이었다고 했다. 한 번쯤 와보고 싶었다고. 테이블이 열개가 채 안 되는 작은 베트남 식당이었는데, 내부는 소박한 어느 가정집 같이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낮은 조도의 조명, 벽에 걸린 인상파 그림과 함께 걸린 맥주 포스터, 깔끔한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과 안락한 의자... 완벽하지 않아서 더욱 편안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나를 안심시켰다. 단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것만 같았다. 문 밖의 사람들은 모르는 은밀한 공간 속으로 숨어든 기분. 세련된 공간은 흔하고 고급스러운 공간은 흉내 내기 쉽지만 인상적인 공간은 그렇지 않다.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곳. 그런 곳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나. 혹시 운 좋게 그런 곳을 찾아낸다면? 나만 알고 싶을 것이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 싶어질 것이다.


식당은 거의 만석이었다. 주말 저녁을 즐기러 나온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호호호 허허허 웃고, 음식이 나올 때마다 서버에게 “thank you”,라고 말했다. 상냥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그가 앉아 있었다. 하얀 얼굴에 짧은 머리를 한 젊은 청년이. 웃을 때면 눈을 내리깔아서 수줍어 보이던 그가. '밥 한 끼 사주겠다'라고 말 하기까지 가슴을 졸였을 그 남자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생일을 함께 하게 될지 모른 채로, 그렇게.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정말 맛있었는데, 정작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쌀국수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데... 아무튼 우리는 맛있는 베트남 음식에 레드 와인을 곁들여 마셨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목소리가 조금 커져 있었다.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듯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정말 유쾌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세월은 기억의 일부를 앗아가지만 어떤 디테일은 촬영된 사진처럼 분명히 살아남는다. 기억이란 참 재밌다. 사람마다 다르게 누락되고, 보존되고, 편집되고,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연 그는 그날의 어떤 디테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각자가 가진 디테일을 합쳐 놓으면 어떤 과거가 탄생할까?     


그가 어떻게 기억하든, 내겐 모든 점에서 완벽한 저녁 시간이었다. 처음 경험한 것들이 많은 날이기도 했다. 베트남 음식을 먹는 것이 처음이었고, 예약된 자리로 안내받는 데이트도 처음이었다. 식당이 위치한 동네에 처음 발을 들인 날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토록 안락한 레스토랑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는 말, 그 싱싱하고 순수한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첫걸음마, 첫 단어, 첫 생리, 첫사랑, 첫 키스, 첫 월급. 우리의 수많은 처음은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처음의 신선한 충격은 우리의 일부를 조금 바꿔 놓기도 하고. 혹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의 처음을 공략하라!      


식당 문을 열고나오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현실의 냄새가 훅 맡아졌다. 꿈이었을까. 저 문 안쪽의 일들은. 버스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우리는 조금 차분해졌다. 어색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감싸고 있던 아늑한 분위기를 벗어나 길가에 덩그러니 놓였으니까. 버스정거장에 다다랐을 때, 그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곤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머뭇거리는 태도가, 용기를 끌어 모은 그 시도가 좋았다. 하지만 그와 나의 얼굴이 꽤나 가까워졌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니고 내가. 이것은 한국인의 종특 일까? 세 번 거절하는 예의 같은? 이렇게 좋으면서, 피하긴 왜 피해.

    

나는 달뜬 상태로 그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오늘 데이트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놀릴 준비를 잔뜩 하고서. 버스에서 내렸을 때 우리 마음은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고, 빗줄기는 좀 더 거세져 있었다. 우산이 없어 난감해 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가 웃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비 내리는 밤거리를 함께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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