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집에서의 따스한 기억

by 테레사

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아버지가 지으신 집이었다. 직접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셨다는 것은 아니고, 집을 지어 파는 것이 당시 아버지의 일이었다. 1980년대, 중동지역에 건설근로자로 파견을 나갔던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아버지인데, 그렇게 사우디아라비아에 다녀오신 뒤 손에 쥐게 된 종자돈과 현장 경험으로 사업을 시작하셨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지어올린 세 번째 주택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완성한 그 집은 부모님에게 핑크빛 희망과 행복의 상징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집에서 부모님은 오빠와 나를 낳아 키우셨고, 할머니를 모셨으며, 때론 삼촌에게 방을 내어주시기도 했다. 막상 결혼해 살아보니 삶이 온통 핑크빛이기만 한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으셨을 테지만, 적어도 알록달록 무지갯빛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사다난 했을, 희로애락이 조물조물 섞여 있었을 그 집은 젊은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지만 결국엔 돌아오고야 말게 되는, 그런 곳이 아니었을지.

이제와 불평하는 거지만 그 집은 겨울에 몹시 추웠다. 아버지 전문분야가 보일러 배관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본인으로서는 매우 난감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각 방은 온돌이 잘 돌아 따뜻했지만 문제는 거실이었다. 애초에 온돌 설비를 하지 않았던 것인지, 했는데 제대로 작동을 제대로 안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거실 바닥이 얼음장 같이 찼다. 한 겨울에 거실을 지나다닐 때는 그 차디 찬 맨 바닥을 밟지 않으려고 카펫 끝에서 문지방으로 짧은 두 다리를 이용해 멀리뛰기를 하며 건너다녔다. 거실은 바다고, 카펫은 섬이라고 상상하면서.


거실 한 편에는 추위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난로가 하나 있었다. 기름이 바닥나 작동을 멈추면 아버지는 어디선가 기름통을 들고 와 난로를 열고 석유를 채워 넣었다. 그 기름통 위쪽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동그란 뚜껑과 어린 내 팔뚝길이 정도 되는 호스가 각각 양 끝에 달려있었는데, 내겐 그 모양새가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으로 보여서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이 어려운 물건을 만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탁탁탁’ 소리를 내며 전원이 들어온 난로에서는 온기가 돌기도 전에 석유냄새가 먼저 서둘러 삐져나왔다. 거실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 낯선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나는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바깥의 추운 날씨를 피해 지낼 집이 있고, 그 집을 돌보는 든든한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리라.


거실 뿐만 아니라 욕실도 무척 추웠다. 한 겨울에 욕실에 들어가면 입김이 나올 정도였으니,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집에서 목욕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세수랑 양치질로만 연명 하다 일주일에 한번 씩 동네 공중목욕탕에 가서 그동안 묵은 때를 씻어냈다. 몸을 대강 흐르는 물에 씻어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고 있자면, 이른바 ‘이태리 타월’을 손에 낀 어머니가 나를 불렀고, 나는 곧 목욕탕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이리 돌리고 저리 숙여가며 내 몸을 어머니에게 온전히 내맡겼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닦아주시던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때밀이 아줌마’(지금의 세신사)에게 나를 부탁했고 아마도 그때 나는 어머니와 살을 맞대는 아주 친밀했던 시기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조금 덜 친밀한 시기로 한 단계 넘어간 것 같다. 부모 자식 간은, 특히나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응당 그래야 하는 거니까. 아이는 엄마의 배에서 나온 뒤로는 조금씩 계속해서 멀어져 결국엔 혼자 서야 하는 거니까.


구멍이 송송 뚫린 플라스틱 목욕 바구니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 자국을 길가에 남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찬바람이 시리다기보다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바나나 우유라도 손에 들려 있으면 그 개운함은 더했다. 그런 날 저녁이면 몸이 아주 가뿐해져 밥도 더 잘 들어가고 잠도 더 잘 왔는데, 그 좋은 기억 때문에 요즘 같이 추운 날씨가 되면 잔뜩 움츠렸던 몸을 세신사에게 맡기고 몸을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발가벗은 몸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이 부끄러워진 지금에 와서는 그것은 내게 실현 불가능한 소망이 되어버렸다.


겨울에 추웠던 것을 빼면 우리 집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볕이 잘 드는 정남향 집이었던 데다가 꽤 널찍한 방이 있었고 비록 폭은 좀 좁았지만 빨래를 널기 유용했던 발코니도 있었다. 안쪽으로 꺾여 들어가 있는 주방도 아늑했는데 무엇보다 재밌었던 점은 주방 창문이 건넛집 주방 창문과 마주보고 있었다는 거다. 어머니는 주방 일을 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주방 일을 하고 계셨을)건넛집 아주머니와 그 창문을 통해 담소를 나누곤 하셨다.

우리 가족은 그 집을 밀레니엄이다 뭐다 하며 떠들썩하던 2000년이 되기 직전에 나왔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한겨울에도 집 안에서 반 팔 옷을 입고 지낼 만큼 따뜻했다. 베란다가 추위를 한 번 흡수해주는 거실은 물론이고, 욕실 또한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이 없으니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열 두 번의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고 나서 결혼해 분가 했다.


안락했던 아파트 생활보다도 첫 집에서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집에 대한 추억도 추억이지만 주소와 전화번호 같은 정보도 정확하게 기억하는 나. 평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겐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곳에서 강렬한 기억이 많을 수밖에 없는 아동기를 보낸 이유도 있겠지만,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많은 기억할 거리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다. 추운 집에서의 따스한 기억. 따뜻한 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따스함.


집뿐만 아니라 삶도 그런 것 같다.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흘러갔던 시절보다 장애물 달리기 하듯 아슬아슬 달리던 시절이 더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기억할 것이 많은 삶이 비단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감히 굽이쳐 흐르는 물 같은 삶에 대하여, 더 많은 기억을 만들고 더 다양한 감정을 풍부하게 느끼는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월간에세이,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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