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민박집 아저씨의 배려로 일요일 낮에 한가로이 글을 쓴다. 마당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은 아직 따갑다. 햇살을 가려주는 하얀 천막 아래 넓은 평상이 있다. 이 민박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바다도 내려다 보이고 파도소리도 적당하게 들린다. 보통 민박집은 하루를 묵고 난 다음날 점심시간이 지나면 퇴실해야 하는데, 이 민박집 아저씨는 오늘 들어올 손님은 없다고 충분히 있다 가라고 하셨다.
"아저씨, 저 오후에 평상에서 책도 보고 쉬었다 가도 될까요?"
"좋은데 왔으니 천천히 쉬었다 가슈. 우리 집은 퇴실시간 같은 거 없슈. 오늘 손님 더 안 오니께 저녁까지 있다가 가도 돼유."
이 민박집에 묵은 건 두 번째다. 2주 전,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장 밖으로 넓은 갯벌과 바다가 펼쳐졌다. 순간 섬에 가고 싶었다. 한 달째 계획만 잡다가 섬 여행을 미뤘다. 아내와 아이들은 집에 내려다주고, 홀로 원산도로 가는 막배에 몸을 실었다. 낚싯대와 간단한 먹을거리만 챙겨 선촌항에 내렸다. 선착장 근처에서 밤낚시를 하다, 인근 민박집에 묵을 생각에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 예상과 달리 선촌항에는 민박집이 없었다. 낭패였다. 그때 선착장 식당에서 추천해준 민박집이 이곳이다. 그때 느낌이 너무 좋아 2주 만에 다시 찾았다. 인터넷 예약은 안 받고 단골 중심으로 운영한다.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뜨내기손님들 왔다가 갔다 하면서 술 먹고 서로 싸우는 꼴은 보기 싫더라고."
푸근한 인상의 민박집 아저씨는 단골손님들과 평상에서 술을 마시는 걸 즐기신다. 어제는 민박집 아저씨가 알려준 갯바위에서 낚시를 했다. 민박집 바로 아래에 해변이 있어서 걸어서 오갈 수 있다.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낚시는 잘 못한다. 그냥 즐길 뿐인데, 아저씨가 알려준 갯바위에서 30cm가 넘는 노래미를 잡았다. 갯바위에서 잡은 인생 최대어다. 회를 뜨는 게 서툴러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이 민박집 단골 같아 보이는 할머니(외모는 아주머니 같은데 딸네 가족과 손자, 손녀와 함께 섬 여행을 오셨다)가 회를 떠주겠다고 말했다.
"가족도 아닌데, 누가 회를 떠주고 이런 건 안 해줘요."
"우리 집사람이 먹지는 못하는데, 회는 기가 막히게 떠요."
사위가 잡았다는 갑오징어를 삶아 내놓으시고 소주를 권하시던 할아버지가 아내 칭찬을 한다. 젊은 할머니는 30cm 노래미를 커터칼로(회칼이 없을 때는 커트 칼로 회를 뜰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순식간에 껍질을 벗겼다. 아무튼 나는 어제 낮에 갯바위 낚시를 하고, 밤에 갯벌에서 해루질을 하고, 또 선착장으로 나가 새벽 낚시를 즐겼다. 그리고 오늘, 일요일 오후 조용한 민박집 마당 평상 위에서 이렇게 글을 쓴다.
내가 섬에 낚시를 하러 온 것인지, 글을 쓰러 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잠까지 줄여가며 밤낮으로 낚시하는 걸 보면 글쓰기는 그냥 핑계 인지도 모르겠다. 어제 육지에서 사 온 미끼가 떨어지는 바람에 오늘 낚시를 하지 않고 이렇게 한가로이 글을 쓴다. 아마 미끼가 남았다면 오늘도 글을 쓰지 않고 낚시를 했을 게다. 지금 딱 입질이 좋을 때다. 물은 빠질 대로 빠졌다. 썰물이 밀물로 바뀌는 시점, 어제 큰 노래미를 잡았던 갯바위 포인트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렇게 글을 쓴다.
미끼가 떨어진 건 다행이다. 미끼가 남았다는 이유만으로입질이 없어도 낚시를 계속하니 말이다. 어제 새벽 1시에 선착장으로 나가 낚시를 했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못 잡고 낙지 한 마리 겨우 잡았다. 민박집에 돌아오니 새벽 4시였다. 피곤한데도 미련하게 미끼가 없어질 때까지 낚시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 온 미끼는 물고기를 잡는 미끼인지, 나를 끝까지 낚시하게 만드는 미끼인지, 내가 그 미끼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새벽에 잡은 낙지 한 마리는 '브런치'로 라면에 넣어서 먹었다. 혼자 먹기 딱 좋은 양이었다. 다음에는 미끼를 조금만 사야겠다.그러면 무리해서 낚시하지 않고 이렇게 혼자 글 쓰는 시간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섬에 혼자 여행 올 때면, 낚시도 낚시지만 바다 앞에서 조용히 책 보고, 명상하고, 글 쓰는 시간을 상상한다. 섬에서 혼자 조용히 글 쓰는 시간이 좋다. 섬이든 절이든, 홀로 여행을 가지 못할 때는 주로 시골집 다락방이나 카페에서 글을 쓴다. 시골집 다락방도 좋긴 한데, 아이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고, 앉은뱅이책상과 의자가 그리 편하지 않다. 그래서 저녁시간이나 주말에 카페로 간다. 시골에서 글 쓴다고 해서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생각해보면 카페에서는 쓰고 싶은 글보다 써야 하는 글을 쓰러 가는 경우가 많다. 일하러 가는 거다. 그럼에도 일은 하지 않고 온갖 잡념을 하다가 그 가지 중에 하나를 잡아서 나를 들여다보는 글을 쓸 때도 있다. 하지만 카페에는 서사가 없다. 섬에는 서사가 있다.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 글을 길게 쓸 수 있으니 말이다.
글을 쓰는 동안 함께 민박집에 묵었던 가족 손님들이 한 낮 해루질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이들이 재잘거린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맨발로 마당을 아장아장 걷는다. 평상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아저씨가 신기한가 보다. 회를 떠준 할머니와 3대가 함께 온 이 손님들도 오늘 뭍으로 나간다고 하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도 짐챙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골의 위용인가?
이렇게 늘여쓴 한 편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가 몇 명이나 될까? 물론 이 초고를 바로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살펴보고 고치고 글을 다듬겠지. 사실 이렇게 초고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다(독자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몇 번은 고쳐진 다음의 글일 테다).
어려운 것은 이렇게 늘여놓은 글을 다듬는 일이다. 먼저 초고에서 어떤 부분이 어색한지, 부족한지를 찾아야 한다. 한 땀 한 땀 고쳐 나간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필요 없는 군더더기는 덜어낸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두드렸으니 글의 순서, 즉 구성을 어떻게 바꿀지도 고민해야 한다. 고쳐쓰기를 반복하다가 너무 귀찮을 때는, 대충 고친 다음 공개하기도 한다. 대충이라는 단어가 좀 그렇지만, 한 편의 글로써 완성도가 있다 싶으면 발행을 누른다(이 글도 섬에서 나오다가 카페에 들러 '대충' 고쳐서 공개했다. 글 한편으로 끙끙거리기는 것도 지겹다.)
파도 소리는 자판을 두드리고 싶게 만든다. 글 쓰다가 막히면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소리 위에다 자판두드리는 소리를 계속 보탰다. 그러다 보니 글이 마지막 회를 앞둔 미니시리즈 마냥 분량 늘이기를 하고 있는 느낌도 없지 않다. 다만 지금 이렇게 글 쓰고 있는 시간을 더 즐기고 싶을 뿐이다.
오랜만에 자판을 두드리는 느낌이 경쾌하다. 머리도 맑다. 방금 전만 해도 '집에 돌아가서는 어떻게 글을 쓰지? 다음 주에 회사 운영은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들로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하지만 섬 여행을 경험 삼아 글을 쓰고 있으니 한결가벼워졌다. 아마도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바닷물이 차가워져서 물고기가 먼바다로 떠나기 전에 또다시 이 섬, 이 민박집을 다시 찾을것 같다. 그때도 이렇게 글 한편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