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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명진 Nov 09. 2019

시골에서 글 쓰며 산다는 것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시골 다락방에서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글 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고요함을 즐기기 위해서는 글 쓰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글은 때때로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기는 하지만, 책 한 권 내지 못한 작가 지망생에게 글은 삶을 지탱해줄 만한 힘이 없다. 글은 쉽게 밥을 벌어다 주지 않았다. 


2015년 가을 어느 날 오후, 나는 다락방에 앉아 한가로이 글을 쓰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간간이 맑은 햇살이 마당에 쏟아졌다. 둘째 아이가 모종삽을 들고 흙장난을 하다가 마당에서 놀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아이가 노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꼬마가 뛰어노는 모습은 언제 봐도 흐뭇하다. 시골집 마당은 4살 배기 아이가 혼자 놀아도 충분히 안전한 공간이다.


다락방에서 내려다본 풍경과 다르게 당시 나는 과도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 10년 만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지만 집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 불안감은 주변의 시선을 감시자로 바꿔놓았다. 평일 낮에 출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젊은 가장을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두려웠다.


햇볕이 좋아 마당에 빨래를 널다가도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면 후다닥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아니 저 집에 아내는 어디 가고 남편이 낮에 집안일을 한 대?’ 이런 시선으로 쳐다볼까 두려웠다. 시골은 여전히 성 역할에 보수적인 곳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자격지심이었다. 우리 집은 주민들이 주로 오가는 마을회관 바로 앞에 있다.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당이 탁 트여 좋지만 사생활 보호가 되지 않는다. 지나는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을 훤히 볼 수 있는 구조다. 


둘째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깔끔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까지 굳이 차를 끌고 갔다. 직장에서 일하다가 잠깐 아이를 데리러 온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이집 선생님은 왜 매일 엄마 대신 아빠가 오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아니, 내가 그런 눈치를 봤다.


이 마을에 이사 올 때만 해도 나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작은 지역신문 기자였지만 지역에서 이 신문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시골에서는 여전히 기자는 배운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통한다. 마을 이장님도 길가에서 나를 붙잡고 몇십 분 동안 지역 돌아가는 이야기를 물어보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신문사를 그만둔 지 몇 년이 지나도 나를 ‘정기자’라고 부른다. 


귀촌하기 전에도 나는 서울에서 인터넷신문 기자로 일했다. 10년 동안 기자만 하다가, 그 일이 지겨워질 때쯤 신문사를 그만뒀다. 틀에 박힌 기사만 쓰는 데 신물이 난 상태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글 쓰고 싶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프리랜서로 글을 써서 네 식구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지 두려웠다. 블로그 기자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등 열심히 글쓰기 알바를 해봤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몇 십만 원 수준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도 안 짓는데 직장까지 그만 두면 온 가족을 바닥도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 같아 오랫동안 망설였다. 대안도 없이 퇴사를 선택하는 것은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하지만 오히려 용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은 아내였다.


“하고 있는 일을 일단 그만둬야, 뭔가 새로운 게 보이지 않을까?”


신문사로 꾸역꾸역 출퇴근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내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 말에 용기를 내보려고 해도 여전히 생계가 걱정이었다. 


“이제는 내가 일할께. 이제 나도 일하고 싶어.”


서울에 살 때, 환경단체에서 일하다 아이를 낳고 8년간 육아만 하던 아내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어 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전담하면, 아내는 다시 일을 할 수 있다.


“그럼 내가 집에서 글 쓰며 육아하고, 달빛(아내의 별칭)이 일할래?”


그렇게 아내와 나는 생계와 육아를 두고 바통터치를 했다. 아내는 유아교육과라는 전공을 살려 유치원 방과 후 교사 일자리를 찾았다. 나는 6개월간 백수생활을 거쳐 귀촌한 또래들을 모아 시골에서 콘텐츠 회사를 창업을 했다. 첫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 2~3년간 직장생활을 하던 아내 역시 ‘새로운 무언가가 보이지 않아서’ 직장을 그만뒀다. 아내도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시골에서 글을 쓰며 먹고살게 됐다. 


아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서 돈을 벌지는 못한다. 대부분 외주를 받아 쓰는 글이다. 그래도 시골에서 글쓰기라는 행위로 네 식구가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다. 게다가 이제는 출퇴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시골의 여유를 만끽한다. 언젠가는 나와 아내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출판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삶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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