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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명진 Mar 30. 2020

나를 위한 초고, 타인을 위한 재고

여러분은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하시나요?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첫 문장만 몇 번씩 고쳐 쓸 때도 있고, 두 문단쯤 썼다가 그다음에 어떻게 이어 써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기도 하실 겁니다. 


운이 좋을 때는 영감이 떠올라 한번에 초고를 써 내려갑니다. 이럴 때는 키보드를 치는 소리도 경쾌하고 종이에 닿는 볼펜이나 연필의 슥삭거림도 부드럽습니다. 메시지, 글감, 구성 같은 것을 미리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감이 알아서 찾아주죠. 그만큼 영감은 강력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영감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감이 자주 찾아오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경지일까요?


영감이 찾아올 때만 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글쓰기가 행복할 것 같네요.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글만 쓰면 되니까요. 하지만 마감이 있을 때 영감만 기다렸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영감은 마감을 신경 쓰지 않거든요. 마감은 다가오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때는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게 마감 날 새벽까지 헤매다가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글을 마무리했던 경험이 수없이 많습니다. 


영감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아마추어, 영감이 없어도 쓸 수 있으면 프로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영감이 자주 찾아오는 사람은 프로를 넘어선 예술가가 아닐까 싶네요. 


초고는 아시다시피 처음 쓴 글입니다. 더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참 쉬운 개념이죠. 그런데 초고 쓰기가 참 힘듭니다. 어떻게든 초고를 써놔야 고치든 덧붙여서 재고를 쓰고 퇴고를 할 텐데 말이죠. 


글을 처음 쓰시는 분들에게 초고와 재고라는 개념이 생소할 겁니다. 글 한편을 마무리했으면 맞춤법만 바로잡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썼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 때문에 한 문장씩 꾸역꾸역 쓰다 보면 속도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쓰면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글이 되기 쉽습니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초고-> 재고-> 퇴고의 과정을 거칩니다. 초고 전에 메모 형태의 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작가들이 메모하는 습관을 강조합니다. 메모는 앞서 말한 영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운전을 하거나 산책을 하다가 얻은 글쓰기 아이디어를 까먹지 않도록 기록해 두는 것이 메모입니다. 그 메모를 읽으면 영감이 다시 떠오를 수 있도록 단서만 적어둡니다. 메모를 보고 영감을 불러와서 한 편의 글로 발전시켜 초고를 완성합니다. 


초고를 완성했다는 것은 완결된 한 편의 글을 썼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기본적인 구성은 잡혀 있어야 합니다. 영감의 도움으로 자연스럽게 글에 구성이 생겼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구성을 짜기 위한 고민 끝에 글을 썼던, 한 편의 완결된 구조여야 합니다. 


다시 쓰거나, 부족한 부분을 덧붙여 나가는 것이 재고입니다. 초고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초고를 바탕으로 처음부터 다시 쓰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저는 초고를 놓고 논리적인 연결이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글의 순서를 바꾸는 등 구성을 다시 짜거나 부족한 부분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재고를 씁니다. 그렇게 재고가 완성되면 퇴고를 합니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초고는 가슴으로 쓰고, 재고는 머리로 쓰는 거야. 글쓰기의 첫 번째 열쇠는 쓰는 거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야.

가슴으로 초고를 쓴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용이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 맞는 문장인지 고민하지 말고 일단 써 내려가라는 겁니다. 누군가 내 글을 볼 거라는 걱정도 내려놓습니다. 나만 볼 테니 마음대로 쓰는 겁니다. 


초고를 쓸 때는 내면의 비평가를 잠재워야 합니다. 이 비평가는 주로 이런 말을 던집니다. "이런 표현은 너무 상투적이잖아. 음, 여기서는 설명보다는 묘사를 하는 게 좋겠는 걸.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독설 퍼붓기를 좋아하는 내면의 비평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는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도 상관하지 말고 씁니다. 그렇게 초고를 쓴 다음에 내면의 비평가를 불러옵니다. 그때부터는 영화의 대사처럼 머리로 재고를 씁니다. 


재고를 쓸 때는 글쓰기의 기본 단계로 돌아갑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전달되고 있는지, 더 좋은 글감은 없는지, 글의 순서를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을지, 묘사를 통해 표현을 구체화할 부분은 없는지 다시 고민하면서 씁니다. 첫 문단도 더 매력적인 방법이 있다면 다시 씁니다. 이 과정을 몇 바퀴씩 돌 수도 있고, 한 바퀴만 돌고 끝낼 수도 있도 있습니다. 


김정선 작가는 <열 문장 쓰는 법>에서 글쓰기는 "나만의 것을 모두의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나만의 표현, 나만의 언어를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마음으로 쓴 초고는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고를 쓰는 겁니다. 


초고는 '나를 위한 글쓰기'라면 재고는 '타인을 위한 글쓰기'입니다.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나를 위해 초고를 써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타인을 위해 재고를 쓰는 겁니다. 따라서 재고를 쓸 때는 독자를 불러내야 합니다. 가상의 독자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내 메시지를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시 고민합니다. 이제 글쓰기의 기준은 '나'가 아니라 독자라는 '타인'에게 있습니다.


이 글 역시 마음 가는 대로 초고를 쓰고 여러 번 재고를 거쳐 쓴 글입니다. 운 좋게도 마음 가는 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글을 쓰다가 영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글의 제목입니다. '나를 위한 초고, 타인을 위한 재고'라는 표현을 찾았고 이 글의 핵심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초고를 처음 시작할 때는 찾지 못한 메시지였습니다. 단지 초고와 재고를 설명하는 글을 한편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장이 이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렇게 초고를 쓸 때 마음을 열었더니 영감이 찾아와 준거라 생각합니다. 초고를 쓸 때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머리로 초고를 쓰고 있었다면 마음은 닫혔을 테고, 나를 위해 찾아온 영감도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 메인 이미지 출처 : Photo by NeONBRAN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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