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 아이들
"섹스나 하자. 그럼 괜찮아 진대."
큰 아이 하원을 기다리다 남편과 단둘이 있으려니 너무 답답해 집 앞 벤치에 나와 앉아있던 참이었다. 잘못 들은 건가. 바로 어제만 해도 정중히 이혼을 요구하는 내게 정신병이니 뭐니 나를 ‘이거, 저거, 그거' 지시대명사로 칭하던 사람이다. 대체 이 사람은 날 뭘로 보는 걸까? 더 실망할 것도 없다. 그러니 무너질 일도 없다. 이미 최저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응시하다 자리를 떴다. 그리곤 곧장 변호사님에게 잠시 보류해 뒀던 소장 접수를 재개해 달라 요청드렸다. 끝까지 존중해 주길. 예의를 갖춰주길. 내 미련스러움을 탓할 일이다. 남편은 죄가 없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졌다. 집으로부터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아이고 뭐고 다 두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다 터진 웃음. 남편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러고 있는 내 신세가 어처구니없어서다. 회사에선 그렇게 잘난 척하며 상식에 맞지 않는 헛소리엔 즉각 쏘아붙이고 보는 콧대 높은 내가, 정작 가정에서는 이런 치욕을 꾸역꾸역 견디며 우산 하나 없이 걷고 있는 내가, 너무 모양 빠져서. 거지 같아서.
얼마나 지났을까. 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어디야?"
"엄마 집 근처야. 배고프지? 갈비탕 끓여놨어. 아빠한테 덜어 달라 해서 같이 먹어."
"아빠가 도시락 시켜줬어. 근데 엄마 언제 들어와?"
"응. 엄마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맛있게 먹고 씻고 쉬고 있어."
"응. 엄마도 밥 챙겨 먹어!"
아기 때부터 유달리 공감을 잘하던 내 첫 번째 보물. 한 번은 산후우울증으로 애 옆에 엎드려 크게 소리 내 운 적이 있다. 그때, 그 작은 것이 뭘 안다고 같이 따라 울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가 슬픔을 함께 느껴준다는 게 너무 벅차서 더 크게 울었던 것 같다. 지금도 냉랭하다 못해 살얼음 같은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아이는 제 부모의 기분을 살피며 더 바르게, 더 착실하게 스스로 할 일을 알아서 해낸다. 그게 너무 마음 아프다. 이미 엄마, 아빠는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준비하는 눈치다. 이런 아이를 보면 내가 더 참아야 되나 싶지만, 정작 나 자신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가는 것을 느낄 때면 자꾸만 이기적으로 굴고 만다.
매번 다잡았다. 이혼은 절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고. 내게 새 삶을 선물할 열쇠라고. 그러나 아이에겐 어떨까. 평범한 가정이 아니라는 굴레, '이혼 가정 아이'라는 색안경, 편견, 그런 것들이 아이의 시선과 마음을 조금씩 어둡게 물들이지는 않을까. 결국 나는 남편말처럼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인 걸까. 이혼만큼은 끝까지 미뤘어야 했나. 아이에게 남겨질 상처를 더 고려했어야 했나.
수천 번 고민했지만 답은 같다. 나는 존중받으며 사랑하고 싶다. 현재를 유지한다면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위장 가정’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그 안에서 나는 천천히 산화돼 부식될 것이고,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우는 법에 익숙한 무력한 순응자로 자랄 것이다.
평온의 가면을 쓴 균열 가득한 집은 결국 무너진다. 지금이냐, 나중이냐, 시간문제일 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진짜 온기를 주고 싶다. 진심으로 숨결 가득한 하루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선택했다. 도망이 아니라, 간절한 소망을 담은 시작으로서의 이혼을.
이 결정이 또 다른 시련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가정의 해체를 요구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 그 점이 가장 뼈아프다. 하지만 이러한 굴곡이 나와 아이들의 삶을 더욱 단단히 다져주리라 믿는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행복해져야 한다. 그것만이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며, 평생 지켜야 할 나의 사명임을, 나는 정말 너무.잘.안.다.
사랑이란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내 세상의 전부.
나는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살아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