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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Aug 10. 2020

미각의 우열은 없다

해파리냉채에 얽힌 행복했던 기억

좋은 사람과 함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행복이다. 요즘같이 요리사가 셰프라는 이름으로 연예인과 같이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도 미각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의 맛집 유랑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지나간 세월 속에 감춰둔 어느 한여름으로 기억된다. 휴일을 맞아 소파에 기대어 TV 드라마 시청에 푹 빠져있는 정오. 해파리냉채를 해 먹지 않겠냐는 아내의 맑고 카랑한 목소리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생각지도 않은 특별한 별 미를 만들고자 하는 아내의 제안에 머리를 갸우뚱하면서도 흔쾌히 박수를 쳤다.

“좋은 생각이네. 오늘같이 무더운 날 해파리냉채로 더위를 확 날려버리면 너무 좋지”


요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미각을 자극하는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장마가 걷히고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 계속되면서 입맛이 집 나간 지 오래였다. 때마침 입맛을 찾을 특별 요리를 만들어 준다니 진한 감동이 얼굴 가득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더위에 지친 입맛과 원기회복을 위해 보양식이라도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터라 절묘한 타임에 찾아온 아내의 제안은 가히 표창 감이었다. 자주 먹지 않는 해파리냉채를 좋아하는 이유는 혀끝으로 느끼는 겨자의 톡 쏘는 특유한 맛과 식감 때문이다.




아파트 창문 위로 한여름의 햇살이 열기를 쏟아붓고 있다. 바다를 가득 담은 해파리냉채가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은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연주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해파리냉채는 하늘색 줄무늬가 문양 된 품격 있는 백색 도자기 쟁반에 담겨 알싸한 미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담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식감을 변화시킨다고 하지 않는가.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아! 정말 맛깔스럽게 보이네. 당신 요리 솜씨 다시 봐야겠어. 마치 해파리가 오색 야채 위에서 꿈틀대며 춤추는 것 같아.” 


진자주색 나무젓가락으로 해파리냉채를 듬뿍 집어 입속에 넣었다. 코끝이 찡해오는 겨자의 매운맛이 입안 가득 소용돌이치며 목덜미가 뻣뻣해 왔다. 순간 겨자에 얽힌 웃지 못할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헤쳐 나와 코끝에 찡하고 멈추었다.    




초복을 앞두고 무더위가 시작된 8월 초순, 더위를 피해 집 근처 목욕탕에서 아내와 사우나를 끝내고 함께 점심을 먹기로 미리 약속했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더위와 함께 온몸으로 엄습해 오는 심한 갈증이 배고픔을 안고 한꺼번에 몰려왔다. 갑자기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음식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물냉면’


여름이면 한 번씩 찾아가던 냉면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 안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에어컨도 제풀에 죽어 더운 바람만 쏟아 내었다. 냉면 집에 도착했을 때 가게 안은 벌써 손님들로 분주했다. 음식 주문을 하라는 종업원에게 물냉면과 비빔냉면, 사이다 한 병을 주문했다. 아내는 언제나 비빔냉면만 좋아했기에 묻지도 않고 주문해 버렸다. 종업원이 물병과 컵, 사이다를 가져왔다. 사이다 한잔으로 입안을 촉촉이 적시며 냉면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벽면에 붙여놓은 ‘냉면의 효능’이란 빛바랜 글귀가 눈앞에 다가왔다.

 ‘메밀은 장을 편안하게 하고, 소화 기능을 도와 장 속에 있는 변을 없애 주지만 많이 먹으면 좋지 않기 때문에 메밀의 안 좋은 성분을 흡수하는 무와 함께 먹어야 합니다. 냉면에 식초를 첨가하면 살균 효과가 있으며, 겨자와 함께 드시면 메밀의 열을 내리고 몸을 차갑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냉면의 효능을 인지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기다리던 냉면이 탁자 위에 자리 잡았다. 큼직한 회 은색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나온 물냉면의 훌륭한 비주얼이 시각과 후각을 사로잡았다. 빠른 동작으로 젓가락을 들고 먼저 냉면 위에 놓인 삶은 계란 반쪽을 입에 넣었다. 계란을 씹다 보니 직사각형으로 얇게 썬 무와 오이 곁에 노른자 조각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냉큼 주워 입 속으로 가져갔다.


이런 일이!


순간 “아~”하는 탄성과 함께 찡그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흐르면서 기절할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만 같은 매운 겨자 맛에 미각의 신세계가 경련을 일으키며 입안 가득 밀어닥쳤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면서 혼자서 놀라 주위를 살폈다. 행여 겨자 덩어리를 한꺼번에 삼키고 당황하는 그 모습에 쾌재 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그것이 꿈에도 생각지도 않은 노란색의 겨자일 줄이야.

 



특별히 별난 식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량고추나 겨자 등 매운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냉면도 별로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아내는 냉면의 풍미를 위해 매운 겨자를 듬뿍 넣어 먹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나하고는 매운맛에 대한 미각이 상반되지만 각자 자기 기호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이니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도 청향 고추 한 접시를 혼자서 다 먹어치우는 사람이니까 더할 나위 있겠는가. 매운 것을 잘 먹는다고 우성이고, 못 먹는다고 열성이 아닌 것처럼.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겨자의 색깔이 연두색 하나뿐인 줄만 알았으니까.


”여보, 해파리냉채 맛이 없어? 먹는 게 시원찮아 보이네."

"옛날 함께 먹었던 물냉면에 얽힌 ‘겨자의 눈물’ 코미디 때문이구나. 하하하“


아내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깔깔 웃었다. 아내의 웃는 소리와 함께 물냉면에 얽힌 오래된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해파리냉채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해파리냉채 맛, 천하일품임. 인정! 당신은 훌륭한 셰프야. “    



세월이 흐르고 연륜이 쌓이면서 음식에 대한 미각도 함께 변해 가는 것 같다. 특이한 맛 때문에 잘 먹지 않던 음식에 대한 미각을 새롭게 찾아가는 것 또한 색다른 쾌감이라 생각해 본다. 천만다행으로 지금은 냉면의 풍미를 즐기며 코끝을 자극하는 겨자의 색다른 향미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음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귓전에 맴도는 말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신의 미각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개인마다 다른 기호의 차이일 뿐, 미각을 평가하는 것은 주관적인 본능을 무시하는 행위 아닐까요? 미각의 우열은 애초부터 없답니다.”


애써 감싸주는 아내의 깊은 애정에 박수를 치며 행복해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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