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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Jul 10. 2020

삶의 부록을 캐스팅하라

부록 같은 새로운 삶을 맞이한 환희와 기대감에 행복한 나의 이야기

눈부신 가을 햇살이 아파트 거실에 부서져 내리는 주말 한낮. 오랜만에 책장 깊숙이 숨겨 둔 일기장을 뒤적이다 까마득히 멀리 달아난 먼지 묻은 기억과 마주한다. 기를 쓰고 살아온 내 인생에서 여름철 소나기처럼 닥친 해프닝이었다. 내 인생의 부록도 생각지 않았던 우연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벌써 몇 년 전 봄날, 2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건강검진 안내서를 받았으나,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검진을 받았다. 오전 내내 받은 검사가 끝난 후 병원장으로부터 검진 결과에 대한 최종 소견을 들었다.

“건강 상태는 대체로 양호합니다. 특히 위와 대장은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담낭 벽이 좀 두꺼워 보이는군요. 쓸개 벽 말입니다. CT 촬영을 한번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체질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더 위험한 요인이 있는지 모르니까 정밀검사를 통해 한 번 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온몸이 석고처럼 굳어오며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2년 전 대장내시경 검사에서 용종 하나를 떼어낸 이력이 있어 더욱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행히 건강 상태가 양호한 편이라 천만다행이었지만, 이름도 생소한 담낭 벽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듣고 난 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소견서를 들고 CT 촬영을 위해 영상 전문병원을 서둘러 찾아갔다. 병원은 새로 신축한 듯 밝고 화사한 인테리어가 돋보였으며 내벽 창가를 따라 전시된 개운죽이 연녹색 빛을 품은 채 생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검사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온갖 상상과 공포가 고문처럼 온몸을 할퀴며 지나갔다.

. ‘만약 담낭암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담낭 절제를 해야 하나?’


갖가지 추측과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소파에 기댄 채 창가에 놓인 개운죽을 향해 무심한 넋두리를 해 본다.

‘가지 끝에 달린 길쭉한 연녹색 잎이 참으로 싱그럽구나. 네가 피운 잎처럼 내게도 청춘이 있었는데.’

개운죽을 붙들고 하소연하듯 혼자 속마음을 삭이고 있는 그때, 간호사의 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차례구나’



한참 동안 의심 부위에 대한 CT(컴퓨터 단층촬영) 촬영을 마치고 나오자 다시 가슴을 엄습하는 긴장과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보다 더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등허리에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절대의 고독감에 휩싸인 채 지그시 눈을 감고 혼란 속에 갇혀있는 내게 간호사가 다가와 판독실로 안내했다. 판독실 상단 좌우 벽면에는 인체의 내부를 촬영한 모니터 영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검사 결과 혹시 안 좋은 문제라도 발견된 게 있습니까?”


반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결과를 묻는 내게 젊은 의사는 몇 장의 영상을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설명했다.

“모니터 영상으로 봐서는 괜찮아 보입니다. 사람의 담낭은 간 아래에 붙어있는 작은 장기이기 때문에 일반 촬영으로는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의심 부위를 여러 각도에서 투과한 X-선을 컴퓨터로 측정하고 단면을 영상화해서 판독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내장의 형태도 다르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고무풍선을 그냥 두면 두껍지만 불어서 크게 하면 얇아지는 이치라 보면 되겠습니다.”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을 다 들었지만 괜찮아 보인다는 소리가 가장 뚜렷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몇 가지 문답이 더 오고 간 후 별다르게 의심되는 점은 없다는 소리에 나는 새 삶을 얻은 듯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래, 아픔도 삶의 과정이다. 이제, 남은 내 인생에 부록을 캐스팅하자. 내 삶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나의 소박한 버킷리스트로 엮은 아담한 별첨 부록 한 권 만들고 싶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서는데 타지에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괜찮아요? 많이 걱정돼서 전화합니다. 안 좋은 일 있는 건 아니죠? 지금이라도 올라갈까요?”


다급한 목소리로 소식을 물어보는 것을 보니 제 딴에는 많이 놀란 모양이다. 걱정해주는 자식의 마음을 가슴에 쓸어 담으며 혼자 조용히 미소를 지어본다. 내 몸은 다시 부록 같은 새로운 삶을 맞이한 환희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오랜만에 머리가 젖혀지도록 크게 웃었다. 차창 위에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맞으며 몸은 오싹할 정도의 행복감에 젖었다. 마치 정지된 시간이 침묵을 깨고 째깍째깍 돌기 시작한 듯. 캐스팅한 부록을 펼치며 내 인생에 시동을 건다.

‘쓸개 빠진 놈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까딱 잘못되었으면 내가 그렇게 될 뻔했잖아.’


‘아프니까 어른이지.’


해학(諧謔)을 품은 나직한 독백이 긴긴 하루의 여독과 함께 가을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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