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즐거운 놀이마당이다
이제 막 도착한 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로 플랫폼은 시끌벅적하다.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 마중이나 배웅 나온 사람들로 역은 언제나 북적거린다. 지난해 여름 어느 날이었나 보다. 오랜만에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가장 빠르다는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혼자서 떠난다는 것은 조금은 용기가 필요했다. 왠지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않을 일이지만 요즘엔 혼자 다니는 게 편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혼자 떠나는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서’, ‘타인이나 주변 환경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여행의 낭만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서’ 혼자 여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낭만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이렇게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낯설지 않은 나와 단둘이서 만나 아무 간섭 없는 곳에서 혼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행의 낭만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서다. 물론 함께 떠날 사람도 마땅치 않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같이 떠날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니라 괜히 함께 떠나자고 하면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야 하고, 여행하는 동안 괜한 간섭도 싫고, 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는 데 불편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신선한 호기심으로 달려온다. 차창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날마다 반복되던 일상의 공간과는 다른 생소한 풍경과 시시각각 변하는 새로운 모습에서 삶의 파노라마를 엮어 보는 것 같은 색다른 경험이다.
부산역에 내려 광장을 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부산 유라시아 플랫폼’을 찾았다. 부산 유라시아 플랫폼(Busan Eurasia Platform)은 부산과 유라시아를 합한 용어로써 지역 활성화와 예술 문화 산업을 촉진시키고자 만든 공간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향한 기점이 될 부산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플랫폼은 부산역 광장의 부산역사 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며, 전체 모양은 간결하게 만든 박스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열차에서 내려 부산역 바깥으로 나올 때 원도심 산복도로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한 것이라고는 설명을 듣고 2층 위에서 보니, 옥상 정원의 푸른 잔디와 뒤편의 산과 건물들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부산역 광장에서 잠시 시간을 나눈 후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달리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생기를 느낀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부산의 명소인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이것저것 볼거리 먹거리가 많아 이곳저곳에 눈이 저절로 많이 간다. 해운대 전통시장을 지나 곧장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해수욕장 입구 앞에는 파도 모양과 함께 북극곰 모양의 캐릭터 3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도 북극곰과 바다를 보호해달라는 캠페인의 일환인가 보다. 이날 갔을 때도 벌써 휴가철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시끌벅적한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해운대 전통시장에서 허기진 배를 채울 메뉴를 찾는다. 불판 위에서 껍질을 벗긴 산 곰장어가 꿈틀대며 맛있게 익어가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해 왔다. 부산에서 빠질 수 없는 돼지국밥과 막창, 그리고 밀면까지 다양한 메뉴들도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집중과 선택을 통해 고른 시원한 밀면 곱빼기와 모둠 만두를 먹고 나니 온 세상을 가진 듯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개장 첫 주말을 맞아 해운대에는 많은 청춘 남녀들이 백사장을 거닐며 사랑을 나누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지나간 세월이 그리워질 뿐이다. 평소에는 마주하지 못하는 바다와 바닷바람, 그리고 백사장, 파도 소리를 온몸으로 느껴보는 감동이 소박한 행복을 전하며 지나간 청춘의 낭만을 자극하고 있다.
부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다다. 그중에서도 부산 바다의 매력을 한껏 풍겨주는 해운대 해수욕장. 해운대 해수욕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 다이내믹한 부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신라의 석학이었던 최치원이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을 벗어나 가야산으로 입산할 때,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 해운대의 자연경관이 너무 뛰어나 절벽 아래 큰 바위에 ‘해운대’라는 글자를 남겼는데, 그 지명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하니 해운대가 품고 있는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감동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한 모양이다.
부드러운 금빛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넓은 백사장을 따라 걷다 보면 웨스틴 조선호텔 방향으로 동백섬과 오륙도가 보이고, 반대편으로 달맞이길 빼곡한 집들이 또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백사장에서 바라보는 동백섬은 고즈넉한 풍광 속에 멋진 자태로 그림처럼 앉아있고, 오륙도는 거친 파도 위로 얼굴을 내밀고 물빛에 닳은 비경을 끊임없이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밀물일 때는 6개의 섬으로 썰물일 때는 5개의 섬으로 보인다고 하니 자연이 연출하는 신비로운 마술은 어디까지일까.
혼자 떠나 찾아온 해운대 여행에서 나를 만나 삶의 여유와 잊힌 낭만을 즐기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경험이 내게는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롯이 남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파도에 발을 담그며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가슴 설레는 잊지 못할 한 편의 추억을 이름 모를 조개껍질 속에 숨겨 놓을지도 모른다. 백사장에서 찾은 청춘의 낭만이 달콤한 것처럼 해운대에서 내가 즐기는 황혼의 낭만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여유롭고 넉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한 발짝 벗어나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자유다. 아무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내가 시간을 데리고 다니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느껴본다. 그리고 여행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인생과 닮아있다. 많은 것을 준비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 길을 떠나면 된다. 꼭 이름 있는 곳이 아니라도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한적한 곳이 더 멋진 생각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혼자서 가는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적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혼행은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복한 놀이다. 놀이와 함께 스스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삶을 즐기는 것, 그것이 바로 낭만이라는 이름의 시간 열차일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삶을 배워가듯 우리의 삶 또한 새로운 모험처럼 떠나는 여행의 놀이에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난 여행에서 잊힌 낭만 놀이를 다시 발견하는 달콤함같이 삶은 놀이처럼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할 뿐, 놀이 또한 삶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낭만에 기대 진지한 삶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삶을 잘 가꾸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혼자 떠나는 여행이 주는 기쁨은 낯선 곳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좀 더 대담해지며, 자신도 모르던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호기심이 주는 선물 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늦기 전에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의 삶에서 한발 비켜서서 청춘의 추억이 아닌 아직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잊힌 낭만을 위해 가슴을 더듬어 본다. 삶의 어느 순간에 맞이했던 마음이 울컥해 오는 감정을 모아 잊었던 낭만 놀이를 다시 즐길 여유로움과 함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용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