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숨은 로망 찾기
스산한 가을이다.
쌓인 낙엽을 가만히 밟으면 서러운 소리 마냥 사각거리는 가을 소리가 외로움으로 내 안에 스며온다. 문득 까마득히 떨어져 나간 희미한 기억의 파편들이 다시 퍼즐처럼 다시 자리를 잡고 들어와 나에게 묻는다.
‘그동안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
살다 보면 그러려니 하고, 참고 미뤄두며 지내온 인색한 삶에 탈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막연한 생각으로 평소와 다른 하루를 그리워했다. 연인과 함께 거센 동해의 해풍을 맞으며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상상 같은 것.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삶의 낯설지 않은 외로움처럼 하나씩 늘어가는 흰머리에서 고독의 그림자를 본다. 오늘만은 나를 위한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어졌다. 사무실에 어떤 핑계를 대며 하루 쉬리라 마음먹었다. 거짓이라도 명분 있는 휴식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무슨 핑계를 대지? 그냥 몸살과 위염이라고 하자.’
절박한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낸 후 자유로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루해서 약간의 균열을 내고 싶었다. 오차 없는 시곗바늘처럼 돌아가며 열심히 살아온 내 몸과 마음이 지친 게 확연히 느껴졌다.
창밖을 본다. 파랗게 시린 하늘에선 가을을 듬뿍 머금은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쏟아져 내린다. 아파트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다보면 작은 인조 연못을 둘러싼 수목들이 색채의 마법에 걸린 듯 저마다 신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가을을 품은 정원을 감상하고 구름이 수놓은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얼마 만인가 싶다.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귀중한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곰곰이 생각했다. 평온한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짜릿한 탈출을 위한 특별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번지점프는 어떨까? 동해바다열차를 타고 혼자만의 긴 여행이나 해 볼까?’
생각나는 대로 메모지에 써 내려갔지만 썩 마음에 차는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낯선 일탈을 위한 화려한 잔치를 꿈꾸었지만 도리어 고민이 되어 돌아왔다. 언제나 정답이라 믿으며 살아온 삶이 족쇄가 되어 일탈마저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지는 좋은 하루를 멋지게 연출해 보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경산 영남대로 향했다. 졸업한 지 벌써 40년이 넘은 곳이지만 꿈꾸었던 추억의 흔적들이 스며있는 캠퍼스가 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때의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은, 묻어둔 내 삶의 로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캠퍼스를 밟으면서 묘한 기분에 들떴다. 모든 것이 바뀐 듯 낯선 곳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난 시간을 느껴보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벤치에 앉아 가을빛이 흠뻑 물든 교정을 두리번거리다 낯선 이방인의 모습을 본다.
‘내가 여기 왜 왔지?’
갑자기 따뜻한 커피생각이 났다. 원두로 직접 내린 아메리카노 한잔.
학교 정문을 빠져나와 낙엽을 밟으며 한참을 느리게 길을 걸었다. 가을을 느끼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과 함께.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풍경화처럼 서 있는 길모퉁이에 아담한 카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하고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대었다. 커피 내리는 소리와 함께 그윽한 커피 향이 코끝으로 전해져 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에 행복이 낙엽처럼 쌓여갔다.
커피잔 속에 마음의 여유를 담아 느긋하게 마시고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탔다. 외로움 때문인지 몰라도 불현듯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성서산업단지역에서 내려 롯데시네마로 향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터미네이터’
상영관인 6층엔 평일이라 그런지 일곱 명의 관객만이 좌석을 채우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젖히고 앉으니 어쩐지 낯익고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인류의 미래를 지키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와의 새로운 문명이 격돌하는 액션 오락 영화’였다. 재미에 푹 빠져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날려 보냈다.
늦은 오후, 해가 짧아진 탓인지 어스름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집안에 진동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손녀가 쪼르르 달려와 스마트 폰을 내밀면서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닮은 연예인, 이순재로 나와요.”
요즘 실시간 검색순위에 오르며 화제가 된 ‘스노우 닮은 연예인 찾기’ 앱에서 나온 사진을 보여주며 깔깔대고 웃었다. 순간, 내 삶의 로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홀가분한 게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쓸쓸하다는 것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누군가의 의미 안에 있는 그곳이 행복한 것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