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장맛비가 연일 내리던 8월 어느 주말의 오후, 허락된 시간의 나래를 펼치며 책장을 정리하다 오랜 시간 동안 감춰져 있던 한 화가의 누드화와 마주하게 된다. 화가는 2001년 11월 말, 가을이 낙엽 속에 묻혀가고 겨울이 서성이는 길목에서 서울 인사동 ‘갤러리 상’에서 기획한 ‘절제된 욕망의 서정, 김교만 초대전’ 팸플릿의 주인공이다.
아마도 화가 김교만은 누드화를 통해 절제된 관능과 욕망 그리고 탐미적 고독의 미학을 상호 교차시킴으로써 인간 본성의 자유로운 가치를 승화시키려는 어렵고 힘든 작업을 했을 것이다. 전체 32페이지에 달하는 그림책자를 펼치면서 그중 유난히 시선이 가는 한 누드화에 대해 작가의 예술세계를 살짝 건드려 보고 싶은 욕망이 장맛비처럼 이유 없이 쏟아졌다.
'관능·탐미·고독 그리고 절제된 욕망의 미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기획된 초대전으로, 화가는 누드에 대한 이미지를 관능적 아름다움과 절제된 욕망을 개성적이면서도 보편적 세계로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여인의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깊은 고독의 그림자를 봄 안개처럼 터치하고 있다. 캔버스에 깔린 은은하지만 농염한 색상은 꿈을 꾸는 듯한 오묘한 향기가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화가는 모델이 딱딱한 통나무 의자에 앉아있는 낯선 포즈를 통해 심미학적 욕망의 껍질을 벗고 내면에 감추어진 고독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니였을까? 매끄럽게 뻗은 등 허리를 보이며 돌아앉은 여인의 몸에는 고독이 물씬 스며있고, 시선은 관람객과 눈 맞추지 않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듯 다른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다. 한동안 이 자세를 유지하며 고정되어 있었던 부자유에 대한 무언의 항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여인이 살포시 뜬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곳은 문득 바깥 풍경이 보이는 미닫이 창문은 아녔는지, 그림 속의 여인만 알고 있을 것이다.
여인의 앞에 놓인 대형 화폭엔 크로키만 한 아직 미완의 누드 그림이 무릎을 구부린 체 허공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있다. 누드로 크로키한 그림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화폭의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날아보지만 알 길은 없다. 화가의 머릿속을 넘나드는 절제된 욕망 속에 갇혀있는 누군가의 이미지를 옮겨놓을 것이란 희미한 상상만 해볼 뿐이다.
여인이 앉아있는 곁에는 작은 교자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손거울이 보인다. 조금 전 자신의 화장한 얼굴을 확인하며 나르시스적 자기도취에 빠진 듯한 여인의 옆 표정은 당당하다. 양발에 슬리퍼를 신고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 앉아있는 여인의 몸매는 관능적 아름다움을 내게 허락하고 있지만, 잘 짜인 배경과 융화된 탐미적 고독에 쌓인 청순한 건강미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여인의 어깨선 위에서 흘러내리는 고독의 빛깔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는 것은 인간 본연의 순결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외의 순간에 찾아오는 창조적 영감은 오랜 기간 해당 분야에 몰입해 능력을 축적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고독한 시간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사람에게는 집중력과 창조성의 기회가 찾아온다.
누드화를 감상하며 모델이 누구인지는 내겐 상관이 없다. 화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도 문제 될 바 아니다. 나름대로 자유롭고 흥미롭게 무엇이던 상상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나의 시선이 매끄럽게 잘 뻗은 여인의 등을 어루만지는 것은 무죄다. 그림 속 여인의 뒷모습은 내게 관음증을 기꺼이 허락하고 있지만 윤리적 논리로 숨겨진 관능미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겠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원초적 본능으로 그림 속에 빠져들다 보면 낯선 에로티시즘이 손을 내밀며 나를 위로할 것이다.
누드화를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화가가 의도한 주제와 달리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 선정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전시관에서 관람자 속에 섞여 함께 볼 때는 별 다른 문제 없이 떳떳하게 볼 수 있을지 몰라도, 혼자서 관람하고 왔다고 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남성이라면 더더욱 엉큼한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것 같고, 남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민망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누드화 전시회를 관람할 만큼 전문적 지식이나 뛰어난 심미안은 애초에 없는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팸플릿에 갇힌 누드를 혼자 감상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누드화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나 오해를 버리고 보이는 대로 보고 생각나는 대로 상상하자.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감추고 가면 속의 눈으로 엿보는 누드란 과연 무엇인가?
"누드"란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아름다움, 특히 여성의 몸매를 작품 속에 예술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명화를 보면 누드화가 무척 많다. 르느와르나 고야 등 세계적인 화가들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누드화를 그렸다. 그렇다면 과연 누드의 시초는 언제, 누구의 작품부터 시작일까? 기독교적인 신앙이 기득 차 있었던 중세시대에 르네상스라는 하나의 예술사의 획기적인 부흥기가 나타난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의 작품이 나오게 되고 그것은 바로 엄청난 사건이 되어버린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려는 기독교의 윤리가 강하게 퍼져있었기에 인간의 육체는 죄라는 관념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의 욕망을 나타낼지도 모르는 누드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보티첼리는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몸을 그리는 건 죄가 되겠지만 신화 속의 인물을 그린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보티첼리는 인간의 신체를 그리고 싶은 마음을 당시 유명하던 그리스 신화의 여신의 형태를 빌어 최초의 누드 작품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여신이라 하더라도 이런 누드 작품을 함부로 그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당시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인간이 아닌 여신의 벌거숭이 몸매를 그린 것이긴 하지만 이때부터 엄숙한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비로소 눈을 돌리게 한 역사적인 작품이 되게 된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누드화를 그려왔다. 누드화만큼 아름다운 그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아름답고 화려하기로 말하자면 꽃 그림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누드화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의 근본적인 실체는 다름 아닌 ‘누드’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더 신나고 경쾌한 답변이 필요하다면 안치환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랫말을 한 번쯤 음미해 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노래도 함께 신나게 부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