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노을빛 삶
어느 날 저녁, 우연하게도 아파트 북서 편으로 난 창문을 바라보다 붉은 불꽃이 서녘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며칠 동안 가끔 비도 내리고 구름만 잔뜩 낀 하늘이 계속되는 것 같았는데 오랜만에 바라보는 하늘 저편에 황홀한 색채를 휘감은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상의 행운이었다. 도시에 살다 보면 노을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니면 볼 여유가 없다는 등의 핑계로 노을을 볼 시간을 놓쳐버리는 것이 나의 삶이 각박해진 탓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촉촉이 젖어오는 찡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노을을 바라보며 아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열리고 신비하고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할 테니까. 그날따라 나는 노을의 빛깔이 그렇게 선명하고 불타는 모습을 생전 처음 본 사람처럼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노을 지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에 잠자던 감정이 다시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다 꺼져버린 줄 알았던 열정이, 다 잊은 줄 알았던 슬픔이, 다 식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이, 내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행복까지도 불꽃이 되어 솟아오르는 것만 같다.
비가 내린 뒤에 나온 해가 서서히 저무는 것을 아쉬워하듯 하늘은 화려한 색채의 축제를 하는가? 자연이 내어주는 신비한 풍경이 정말 장관이다. 석양이 물들인 노을은 말로서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한 불꽃이다. 어떻게 저렇게 멋지게 물들일 수가 있을까? 멀리 보이는 길가 가로수 잎에는 비가 내린 흔적으로 맺힌 물방울에 붉은 노을빛이 반사되어 영롱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누가 이 자연의 색깔을 뿌려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싶다. 노을 지는 멋진 광경을 한없이 바라보고 서 있으니 뒤숭숭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저녁노을은 지는 해를 배웅하는 이별의 손짓처럼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다. 해가 지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하늘을 날던 새들도 자기 둥지로 돌아가고, 사람들도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가족이 있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간다. 노을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하루를 다 써버린 갖가지 사물들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절박감도 있겠지만 황홀하고 경이로운 시간이 떠난 뒤에 찾아오는 평온함 때문이리라. 불꽃을 피우던 노을이 차츰 옅어지다가 산등성이 너머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면서 오늘따라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아마도 하루를 돌아보며 내 삶의 행로를 조용히 묵상하는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포옹하고 싶은 욕심 때문은 아닌지.
노을이 진다. 하루를 빛내고 먼 산 너머로 몸을 숨기며 못내 전하는 아쉬움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안은 노을같이 어쩌면 내 인생의 행로도 저와 같을까. 잠시 물러서서 일상의 삶에 부대끼며 치열하게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돌아본다. 스스로를 헤아릴 시간도 주지 않고 누군가 정해놓은 행복의 잣대에 집착하여 좇아가던 숨 막히는 순간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같이 노을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날은 괜한 미소가 번진다. 내가 사는 동안 아직 더 많은 노을을 볼 것이고 노을을 보는 동안은 내 마음도 노을처럼 순연해지리라 믿는다. 어제의 어둠을 지우고 오늘은 하나의 빛깔로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노을처럼 내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은은히 번질 수 있는 노을빛 삶이었으면 좋겠다.
한참 동안 노을을 바라보며 서 있던 나는, 어느 순간 노을을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고 못다 한 삶의 또 하나의 의미를 노을 속에 묻어둔다. 그것은 어느 먼 훗날에 내가 다시 맞이할 그리움이니까.
이문세의 노래 ‘붉은 노을’ 가사 중 일부를 음미해 본다.
그 세월 속에 잊어야 할 기억들이
다시 생각나면 눈 감아요.
소리 없이 그 이름 불러요.
아름다웠던 그대 모습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후회 없어 저 타는 노을 붉은 노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