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쁨이 다가와 행복을 말해준다
떡갈나무에서 하나둘씩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봄은 코로나에 섞여 가벼운 입맞춤으로 떠나고, 여름은 무더위를 누리다 태풍 소리에 놀라 떠나가 버린 지금은, 잎의 축제로 들썩이는 가을이 내 곁에 와 서성이고 있다. 가을이 오면 왜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지 모른다. 세월이 많이도 흘러갔지만, 아직도 내 안에 자리한 감성의 눈빛은 감출 수가 없는가 보다.
아침저녁으로 느끼는 소슬바람이 가슴속으로 스며들며 움츠린 듯 내 몸은 계절이 붉히는 얼굴을 매만지며 손을 녹인다. 선뜻 하늘이 보고 싶어 지는 외로움이 허공에 떠 있는 열기구처럼 어디론가 하염없이 날아간다. 하늘은 자꾸만 파란 물빛을 닮아가고 있는데 아파트 모퉁이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아직도 초록빛을 감싼 체 묵묵히 서 있다. 못내 떠나기가 아쉬운 듯 미련에 밀려 머뭇거리는 모습이 이별 앞에 선 연인처럼. 나는 눈물만큼이나 맑은 동심을 깨우듯 나의 안에 잠들어있는 향수를 건드리며 어디론가 떠나고픈 외로움 위에 살포시 가을을 덮는다.
오늘 아침은 참으로 밝은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외로움으로 식은 마음에 단풍잎보다 붉은빛의 온기를 전해 오는 듯하다. 나는 블라인드를 한껏 위로 올리고 온몸에 햇살을 받으며 며칠 전 퇴근길에 동네 꽃집에서 사다 놓은 노란 국화꽃 화분에 조심스레 물을 뿌려준다. 국화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송송이 달린 노란 꽃망울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햇살에 부딪혀서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이는 자태에 흠뻑 취해 오래전에 잊었던 기억 하나를 꺼내 본다.
나의 기억은 십여 년 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며 잊고 싶지 않은 따뜻한 행복과 마주친다. 가을의 어느 날 아침,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후배 여직원이 심한 편두통과 현기증으로 가톨릭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평소 건강하고 발랄한 성격의 후배였는데 갑자기 웬일이라며 걱정이 앞섰다. 이튿날 출근길에 꽃집에 들러 쾌유를 빈다는 작은 메모와 같이 꽃망울이 소복한 국화 꽃바구니를 그에게 보냈다. 그는 뜻밖의 나의 위문에 당황했는지 곧바로 스마트폰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선배님, 보내주신 꽃바구니와 메모, 정말 감사합니다. 병실 가득 피어나는 국화 향이 가을을 듬뿍 안겨주니 편두통으로 처진 마음조차 한결 가벼워지네요. 퇴원하면 따뜻한 커피 한잔 올릴께요 ^^.”
그의 메시지를 받고 나는 회사 일은 생각 말고 몸조리나 잘하라는 의례적인 문자를 전했다. 평소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전화 한 통 정도 하는 가벼운 예의로 병문안을 대신했지만, 내가 아끼는 후배 직원의 갑작스러운 입원에 마땅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선택한 것이 꽃바구니였다. 편두통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신경과적 정의로 ‘평소에는 아무런 증세가 없다가도 갑자기 눈앞에 섬광이 번쩍거리며 순간 머리 한쪽이 터질 듯이 아픈 통증과 함께 울렁거림과 메스꺼움, 구토 등을 동반한 증상’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사실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내 주위에도 있었지만 한번씩 그냥 스쳐가는 통증 정도로만 알았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편두통을 앓는 사람의 이야기로는 ' 편두통에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그 고통을 잘 모를 것'이라는 애매한 말로 넘기지만, 일상생활에서 주기적인 통증으로 꽤 많은 불편을 겪게 하며 삶의 질을 떨어 뜨리는 질환인 것만은 틀림없다.
일주일 후, 핼쑥한 모습으로 출근한 그는 입원해 있는 동안 국화향에 묻혀 향긋한 위안을 받았다며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서 보낸 혼자만의 시간은 숨김없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선물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특히 자신을 위해 앞만 보고 살아온 이기적인 욕심에 대한 후회와 함께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하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여지기 시작하며 세상을 보는 관점이 더 넓어진 것 같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또한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딸의 병간호를 위해 올라와 오래간만에 모녀가 함께 지낼 수가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듬뿍 받은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아직도 한의원에서 통근 치료를 받는 환자의 처지지만 그래도 편두통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아 다행이라 여기며 이제부터 어머니께 안부 전화라도 자주 드릴 것이라고 했다.
이제 가을은 나무들의 화려한 축제와 함께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 다른 추억의 영상을 만들며 깊어 갈 것이다. 저녁에 퇴근하여 돌아와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는 창밖을 바라보며 국화 꽃잎을 따서 입술에 대고 삶의 여유로움과 즐거움을 음미하며, <좋은 생각>이라는 책에서 본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문장 하나를 떠올린다.
‘고개만 들면 천 번도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을 올해도 서너 번 봤는지 아니면 한 번도 안 쳐다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 늦은 퇴근길에 일부러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들’
사실 하늘에 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체 살아온 시간 앞에 서서 새삼스럽게 별을 쳐다본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오늘따라 밤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지만 늘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다만, 어둠에 가려 그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희미한 별빛이라도 찾을까 창가를 서성인다. 내 마음의 외로움이 가여워 별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을 내어 준다면, 나는 눈이 시리도록 별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 별이 잠든 아침이 오면 내 그리움도 함께 잠들기를 바라면서.
아무리 작은 기쁨이라도 고난을 이겨내는 기다림 속에서 다가올 때 더욱 빛난다. 어쩌다 만난 저녁 석양의 노을빛 하늘을 바라볼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눈 부신 햇살 속에 얼굴을 가만히 내밀고 앉아있을 때나, 즐거운 마음으로 꽃을 바라보며 향기에 취한 순간처럼 행복은 언제 어디서든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간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행복을 붙잡는 건 오직 자신의 몫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