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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Aug 03. 2020

어둠보다 짙은 아메리카노의 여운

숨겨진 사연 속에 다 타버린 지독한 그리움처럼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유명 커피 전문점은 아니지만 주인이 직접 원두를 로스팅해 준다는 꽤나 이름난 동네 카페를 찾았다. 실내에는 라흐마니노프의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카페는 이 외로 많지 않지 않다. 나무로 된 2층 계단에 올라서니 원두커피 향과 클래식이 뒤섞여 오감을 자극한다. 커피점의 명성에 비해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사방이 편백 나무를 붙여 만든 벽이라 그런지 정화된 실내 공기가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신선함을 더한다.


카운터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무선진동벨을 바라본다. 몇 분이 지났을까 둥글게 생긴 호출기가 윙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나는 커피잔이 놓인 쟁반을 조심스럽게 받아와 탁자 위에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에서 그리움처럼 풍겨 나오는 짙은 커피 향이 코끝에 와 머문다. 누가 뭐라 해도 원두의 향과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커피는 아메리카노라고 생각한다.


커피잔을 앞에 놓고 잠시 향을 즐기는 나에게 주인이 다가와 달달한 디저트 같은 설명을 해주었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원두는 주로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 케냐 지역의 원두로 예가체프나 수프리모, 케냐 AA를 주로 섞어서 많이 쓴다고 하면서 커피는 섞는 비율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메뉴판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등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가격에 부담 없이 맛과 향을 즐기기 좋은 커피는 아메리카노라 생각한다. 물론 원두의 맛과 향을 가장 잘 느끼려면 아무래도 에스프레소를 먹어야겠지만 그건 너무 쓰기 때문에 아메리카노로 즐기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입안에 넣고 향미를 즐긴다. 전체적으로 쓴맛이 강했지만 좋은 밸런스를 갖고 있었다. 부드럽고 깔끔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본다. 오늘도 여지없이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 아래로 보이는 금호강의 싱그런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건강과 여가를 위해 혼자 또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고 뛰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어르신들은 게이트볼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강변에는 청보리의 초록 물결과 유채꽃의 황금물결이 장관을 이루며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매는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카페에서 내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커피의 맛 그 자체보다는 커피가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었는지 모른다.


건너편 탁자에는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것만 같은 아가씨 둘이 무언가를 열심히 속삭이며 웃고 있다. 청춘의 느낌은 싱그러운 풀잎 향처럼 정말 좋다. 삶의 용기와 희망이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것만 같은 그 모습에서 출렁이는 물빛을 보는 것만 같다. 내게는 저런 시절이 아예 없었던 것만 같은 외로움이 커피잔 속에 내려앉는다.




나는 짙은 어둠 같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검은 물빛 위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지만,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은 로맨틱하게 가슴을 울려 놓고 있다. 천천히 한 모금씩 음미하며 커피잔 속에 녹아있는 혼자만의 세계를 다 마셔버렸을 때 피아노 선율은 마침표를 향해 조용히 돌아서고 있었다.


누군가의 숨겨진 사연 속에 다 타버린 

지독한 그리움처럼.         


커피는 악마같이 검지만
천사같이 순수하고
지옥같이 뜨겁고
키스처럼 달콤하다.    

                                    탈레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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