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들꽃, 바람 그리고 도깨비바늘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가을 산을 트레킹 하려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천산을 찾았다. 산 입구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너무 힘들지 않은 가벼운 등반을 시작했다. 올라가는 등산로엔 떨어진 낙엽이 가을의 정취를 한껏 품어내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붉게 물든 나뭇잎이 산자락을 품고 서 있는 나무와 떨어진 낙엽이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마천산의 풍경이 명화처럼 내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자연이 품어내는 조화로움을 눈에 담다가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스마트폰으로 곳곳의 풍경을 찍었다.
빨갛게 익은 단풍잎은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아름답다. 밤나무, 도토리 나뭇잎은 떨어진 지 오래인지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며 계절의 아쉬움을 소리로 토해낸다. 나무마다 품어내는 잎의 색깔은 다르지만 저마다의 고유함으로 산색을 물들이는 모습이 장관일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가을이 가져오는 화려한 빛깔만큼이나 내 마음도 붉게 물드는 것만 같다.
나는 천천히 산을 오르며 산기슭에서 만난 들꽃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다. 가던 발길을 멈추고 앙증스러운 작은 꽃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본다. 길섶 이곳저곳에 옹기종기 피어있는 노란 들꽃은 가을을 못 잊어 이제 피어난 것일까? 어디선가 잎새를 흔들며 바람이 불어온다. 가끔 산기슭을 따라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도 이제는 제법 쌀쌀한 기분이다. 가을이 떠나야 할 채비를 차리며 작별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산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반갑다. 단풍이 있고, 들꽃이 있고, 시원한 바람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일상에서 너무 쉽게 지나쳐 왔던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처럼 가을이 주는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다. 오랜만에 찾은 산은 내게 살아갈 용기와 행복을 선물해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이번 가을엔 누군가와 사소한 일들로 엮어진 미움도, 누구보다 많은 것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으로 틀어진 사랑이 있더라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가파른 산길이 시작되면서 숨이 차오른다. 한때는 가뿐히 걷던 길이었는데 뜻밖에 겪은 심장 시술로 인해 이제 만만치 않은 것을 몸으로 느낀다. 헉헉거리며 작은 산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잠깐 쉬어갈 요량으로 걸음을 멈추고 길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사방이 조용하다. 내 발자국 소리에 묻혔던, 산이 품고 있던 소리들이 조심스럽게 살아나고 있다. 걸으면서는 둘리지 않던 물소리, 풀벌레 소리,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구름 흘러가는 소리가 내가 멈추니 들려온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듣지 못했던 자연의 소리다. 저렇게 세상 모든 것은 각자의 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나직이 들려오는 물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길옆 작은 개울에 물이 졸졸 흐른다. 나는 산이 좋아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물은 산을 버리고 저렇게 흘러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 같은 이별의 시상이 함께 떠 오른다. 산은 소리 내며 멀어져 가는 저 물을 탓하지 않고 말없이 그냥 바라만 보고 있듯이. 선뜩해지는 머릿속으로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만나면 언젠가 헤어진다는 사실을 저렇게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산은 아마도 자연의 이치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다시 등산화를 조여 맨다. 경사가 가파른 산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온 산이라 그런지 힘이 든다. 잠시 소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내려갈까 생각하며 가쁜 숨을 정리하는데 저만치에 고느적한 옛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강 서원’이라는 안내판이 둘레길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안내판에는 ‘이강(伊江) 서원은 조선 중기에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 전투에서 공을 세운 낙재 서사원의 위패를 봉인한 서원으로 인조 17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가깝지만 낯선 곳에서 이외의 인물을 만난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어디선가 한 줄기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등허리에 살짝 맺힌 땀방울로 온몸이 써늘함을 느낀다. 천천히 산을 내려오다가 방향이 헷갈려 길이 아닌 풀숲을 헤쳐 나오니 바늘 같은 긴 씨앗이 언제 어디서 붙었는지도 모르게 옷 전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꼭꼭 찔러대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빨리 뽑아내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들의 옷에도 수없이 많은 바늘 같은 씨앗이 박혀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옷에 붙어있는 바늘 씨앗에 할 일 없이 화를 내며 한동안 말없이 서로 떼어내는 일에만 집중했다.
바늘 씨앗 때문에 30분 이상 신경을 쓴 탓인지 갑자기 머리가 띵해져 왔다.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아들과 함께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와 헝클어진 마음을 다잡으며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후 손과 얼굴만 씻고 책상에 앉았다. 도대체 바늘 같은 식물의 이름이 무엇이지? 하는 생각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바늘 식물'을 입력하였더니 도깨비바늘이란 식물이 사진과 함께 나타났다. 백과사전에서 인용해 보면 '도깨비바늘은 씨앗의 끝이 4지 창으로 갈라진 뾰족한 침에는 화살표 모양의 가시가 있어서 한번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성질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도깨비바늘은 움직이는 동물의 몸에 씨앗을 붙여서 멀리 보내고 싶은 엄마의 마음으로 퍼뜨려 번식을 하는 지혜로운 식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에 올 때까지 불쾌했던 마음이 식물의 생존본능을 알고 나니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현상이구나 생각하며 혼자서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집으로 오는 내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와 작은 바람에 떨어져 내린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가을 속에 묻힌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간 짧은 시간의 가을 산행이었지만, 머릿속은 한결 맑아지고 삶의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받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 19로 우리의 일상이 언택트 문화로 바뀌었지만, 가을이 훌쩍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가까운 가을 산을 찾아 삶이 행복해지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