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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천수 Nov 18. 2020

술 한잔

때로는 말보다 편한 위로




          

가을만큼이나 쓸쓸해지는 날이었나 보다. 술 한잔 하자고 연락을 해 온 지인에게 몇 번이나 다음에 하자며 거절하다가 우연찮게 집 앞에서 만나 인근에 있는 삼겹살 전문집으로 갔다. 밝지 않은 조명 아래 조금은 비좁은 테이블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왁자지껄한 분위기다. 술자리야 언제나 시끄러운 장소인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곁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대화는 자연스레 귓전에 몰려온다. 친구의 새로 산 외제 자동차 자랑,  야심 차게 투자했던 사업을 코로나 19로 인해 접은 이야기, 얼큰히 취한 친구가 늘어놓는 무겁고 답답한 정치 얘기까지, 술맛을 자극하는 다양한 안주거리가 각기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쉼 없이 흘러나온다.

      

분위기에 취해 술 한 잔을 지인에게 따르며 질문을 던졌다. “요즘도 술 많이 하십니까?” 지인은 술버릇 때문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에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해 왔던 것이다. 그는 술만 한잔 들어가면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하면서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나쁜 술버릇이 있었다. “아니요. 최근엔 술을 끊다시피 하고 삽니다. 몸도 전만 같지 않아서요. 그리고 지난번 서류 작성을 너무 잘해 주셔서 사건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난여름에 지인이 법적 소송 문제로 몇 가지 서류 작성에 어려움을 겪을 때 내가 도움을 준 일이 있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 사건 해결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다행이었다. 행여 또 다른 일로 부탁하러 왔는가 싶어 걱정했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지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못 드려 항상 미안했다면서 오늘은 자기가 한잔 사겠다고 했다. 걱정했던 마음이 풀리며 술맛이 한층 더해줄 것만 같았다.      



우리 주변만 둘러보더라도 술을 마시는 이유는 너무나 다양하게 많다. 때로는 사는 게 힘이 들어서, 때로는 외롭다는 이유로, 때로는 마냥 즐겁다는 이유로, 때로는 사랑과 이별을 위해서 우리는 술을 마신다. 술은 마법처럼 기쁠 때는 더욱 기쁘게 해 주고, 슬플 때는 슬픔을 잊게 해 주며,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 들을 빨리 가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술 한잔하자"라는 이 말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간단히 주고받는 인사치레 정도겠지만 적어도 내게 전해오는 그 한 마디는 그 사람이 나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다는 공감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기 때문이다.      




조용한 카페에 마주 앉아 연인과 마시는 드라이한 와인 한잔은 그들이 나누는 감미로운 행복을 담고 있고, 사업에 실패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소주 한 잔은 그의 씁쓸한 고뇌를 담고 있으며, 일요일 저녁 끝나가는 휴일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치킨과 함께 마시는 청량한 맥주 한 잔은 포근한 편안함을 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술에 대한 특별한 기억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특별한 기억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행복한 술자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술 앞에 무력해져 저지른 실수 때문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술 한잔에 삶의 아픔을 위로받고 위로해주던 날들의 기억이 잊히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때는 그랬다. 힘든 하루를 위로해주는 한잔 술이,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잊기 위해 마시던 술 한잔이 그때는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고 응원이었다. 오늘도 하루를 끝내는 시간에 누군가와 술자리가 있다면, 즐거운 생각으로 가볍게 마시는 습관을 들여보자.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훨씬 행복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酒” 자를 보라! ‘물 수변’에 ‘닭 유’ 아니던가? 술은, 닭이 물을 먹듯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마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무리해서 급하게 마시면 몸에 해로운 것이라고 경고라도 하듯이.      


 

꽃은 반쯤 핀 것을 바라보고, 술을 반쯤 취하게 마신다.     
 채근담(菜根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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