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설거지를 하면 온 가족이 행복해진다

공평하신 하나님


어린 시절 가부장적인 경상도 대구에서 성장한 나는

'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된다. 그러면 고추가 없어진다.'

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정말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소중한 신체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부엌출입을 안 했다.


선친께서는 이불 개기, 집청소, 설거지 등 집안일을 전혀 안 하셨다. 어린 시절에 그 이유를 질문드렸던 적이 있다.


그때 선친의 대답은 " 나는 객지에서 자취생활하며 워낙 많이 해봐서 지금은 안 해도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의식과 일상은 그가 성장하고 거주하고 있는 지역과 문화와 시대에 큰 영향을 받는다.


인사예절이나 독서습관, 미술이나 음악 감상법, 공부나 운동습관 등 어린 시절에 배워야 할 것을 제때에 배우지 못하면 나중에 성장해서 배워야 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2.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나의 신혼시절이던 약 28년 전에는 '집들이 문화'가 있었다.


이사를 하면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과 가까운 친지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상다리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려서 함께 먹던 문화다.


집들이를 마치고 손님들이 다 돌아가고 나면 주방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릇들을 보고 내가 스스로 긴 시간 동안 설거지를 했던 기억이 있다.



3.


페이스북을 통해서 매일, 또는 주말에 집에서 설거지를 하신다는 페친 남성분들의 글을 가끔씩 읽게 된다. 존경스러웠다. 좋은 분들, 훌륭한 분들이다.

나도 따라 한다고 해봤지만 역시 매번 작심삼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재활용쓰레기나 음식쓰레기를 버리고 청소기 돌리는 일과 무거운 물건 옮기는 일, 빨래 개기 등은 늘 하고 있으니 그리 나쁜 남자는 아닌 거... 맞지?)



4.


7년 전쯤 추석 명절에 온 가족이 대구 본가에서 함께 식사한 후 한 며느리가 "오늘 설거지는 남자들이 하자~~"라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께서 " 설거지... 그거 뭐 할 거 있다고 남자들 시키노~~~"라고 말하시며 직접 설거지하셨던 장면이 기억난다. ㅎㅎ


그런데 올해 추석 명절에는 이변이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식사 후 " 오늘 설거지는 남자들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한다!! "라고 선포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내가 설거지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적이 없다~"라는 말을 하며 막 허풍을 떨었다.


두 아들과 형님과 나, 이렇게 4명의 남자들은 가위바위보 혈투를 벌였다. 나는 단판을 원했지만 어머니께서 삼판양승으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대충 가위도 내고 주먹도 내고 막 내는데, 다른 세 명의 남자들은 체계적이고 통계적으로 머리 굴리며 고민하면서 내는 것 같았다.


첫 판은 모두를 제치고 내가 승리했다.

수차례의 가위바위보 후에 드디어 마지막 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기세 좋게 '보'를 내었는데. 나머지 세 명은 '가위'를 내었다. 올 것이 왔구나!


역시 불길한 예감은 어긋나는 적이 없구나!


평소에 설거지 안 하는 나쁜 남자를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다가 명절에 이런 방법으로라도 강제로 설거지를 시키시는구나. 역시 공평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빠가 설거지하는 동안 두 아들은 뒤에서 좌불안석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고, 막내딸은 재미있어하고 심지어 통쾌해하는 것 같다. 동영상과 사진을 막 찍는다.


어머니는 설거지하고 있는 차남이 전날 서울에서 대구까지 8시간 장거리운전을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기억나셨는지....

아들이 설거지하는 동안 밖에 나가서 계셨다.


완벽주의 성향의 태변은 설거지도 완벽하게 깨끗이 해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 나의 설거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좌불안석인 가족들이 많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크로스핏으로 단련된 온몸 근육을 사용하여 초스피드로 설거지와 싱크대 청소와 행주 빨래와 음식쓰레기 처리까지 대충 완벽하게 마쳤다.


내년 설명절에는 가위바위보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 설거지를 초스피드로 해버리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5.


내가 어린 시절부터 대구에서 온 가족이 함께 출석해 온 S교회는 요즘은 설거지 당번제를 시행해서 장로님들과 담임목사님도 예외 없이 설거지를 하신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가 신장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의 정치는 정반대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심히 걱정이다.


공평하신 하나님과 역사의 신과 부처님께서는 선량한 국민들을 근심하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하는 나쁜 정치 지도자들을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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