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두 명의 엄마가 있다. 낳아주신 엄마 그리고 키워주신 엄마
하지만 낳아주신 분은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기에 내가 '엄마'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대상은 한 명뿐이다.
그러나 엄마는 평생 '엄마'라는 단어 앞에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셨던 것 같다.
아빠의 지인들은 몇십 년 만에 만난 나를 보면서 '엄마랑 똑같이 생겼다'고들 하신다.
아마도 돌아가신 엄마는 나랑 비슷하게 생겼나 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나 어릴 적 병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어떤 아주머니와 함께 갔던 동네 목욕탕에서 보았던 마를 대로 마른 모습뿐이다.
당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서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대체 무슨 정신으로 어린 딸을 데려갔을까 싶은 생각이 나중에야 들기도 했다.
어쩌면 함께 갔던 동네 아주머니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당시 목욕탕에서 엄마는 나와 눈 한 번 마주칠 기력도 없는 상태였으니 티브이에서 가끔 죽어가는 엄마가 마지막 순간에 아이들에게 가슴 저린 말 한마디씩 하는 설정은 모두 거짓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아빠는 내가 열 살 때 재혼하셨다.
당시 엄마는 30대 초반의 미혼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노처녀이긴 했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엄마가 자기보다 9살이나 많은 애 둘 딸린 홀아비한테 시집온 이유를 모르겠다.
'아빠를 엄청 사랑했나?' 하는 좀 우스운 생각을 하다가 무슨 생각으로 아빠랑 결혼했느냐고 물으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빠가 굉장히 부자인 줄 알았어' 하는 엄마
살림이 궁핍하여 방 하나에 세 들어 살던 엄마의 사정을 모르고 신혼집에 예쁜 꽃다발을 사들고 왔던 엄마 친구들의 난감한 표정을 엄마는 모두 견디었다.
신이 세상 모든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어 보내준 사람이 엄마임을 나는 평생에 걸쳐서 경험하고 있다.
엄마와 처음 서점에 갔고
엄마와 처음 음악회에 갔고
엄마가 처음 나에게 생일파티를 해 주었고
엄마가 처음 크리스마스 때 선물다운 선물을 사주었다.
학교에서 곤란한 일에 있을 때마다 찾아왔고
딸아이의 성장단계마다 필요한 것들을 찾아주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위해 당시 시장통에 있던 집을 정리하고 맹모삼천지교를 감행한 엄마.
나는 환경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직접 경험했다.
만약 내 인생에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내가 겪어보니 아이를 낳았다고 또는 아이가 생겼다고 갑자기 엄마가 되지 않는다. 하루하루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엄마가 된다. 그런데 처음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갑자기 10살 넘은 아이들을 자식으로 받아들이기에 엄마의 갈등은 얼마나 심했을까?
엄마는 자식을 더 낳지 않고 우리 남매만 키웠다.
그리고 평생 돌아가신 엄마의 제사를 지냈다.
1년에 세 번, 제삿날과 두 번의 명절마다 엄마는 큰 집에서 음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그때부터 또 우리 집 제사음식을 만들었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보니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이 많은 홀아비와 결혼한 엄마의 젊은 날은 팍팍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상을 차려도 한정된 예산으로는 항상 무언가 부실해 보였다.
따지고 보면 있을 건 다 있다. 그런데 없어 보인다. 엄마는 속상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힘만 들고 고생한 티도 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릇 때문이라는 것을.
제사상에 하얀 종이를 깔고 사기그릇에 음식을 담았으니 전체적으로 허연 것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엄마는 제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제기는 비싸다. 엄마에게는 가격이 문제였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대체 남편은 뭐 하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사람은 다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제기는 고르기도 힘들다. 제기를 사려면 나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브랜드도 알아야 하고, 몇 개면 되는지도 알아야 하고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일 년에 두세 번 필요성을 느낄 뿐 인 나에게는 귀찮은 게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후 수중에 돈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귀찮다는 핑계로 제기 사는 것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명절 대목을 맞아 마트에 그럴듯하게 전시해 놓은 제기세트를 보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올해도 고생만 하고 힘 빠질 엄마 생각에 나는 서둘러 30여 개의 제기세트를 구입해서 엄마 집으로 보냈다.
제기를 받았는데 좋아 보인다며 기뻐하는 엄마.
그 빨간 목기 위에 소담스럽게 음식 담아 멀찍이서 바라보며 흐뭇했을 엄마.
차례 지내는 집이면 다들 있는 제기.
남편이 사별한 전처의 제사를 지내는데 쓰일 제기.
그게 있다고 엄마의 수고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기뻐했다.
엄마는 30여 년 전 아빠와 결혼하면서 아이들 엄마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보니 알겠다.
당장은 남편에게 하는 약속이었겠지만 멀리는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서운함이나 오해 같은 것들을 더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까지 30여 년이 지나도록 그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성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매번 티는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십 년 만에 생긴 제기로 그 간의 성실함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는 듯 그렇게 기뻐하셨다.
처음엔 헌신이었을 거다. 그러나 헌신은 무언가를 희생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건 힘든 일이다.
엄마의 헌신은 이제 엄마의 생활이 되었다. 그리고 평생 성실하게 살았다.
엄마는 처음 헌신했을 때보다는 덜 힘들 거다.
그래서 엄마는 살 수 있었다.
헌신하지 않고 그냥 성실하게 살기로 했기에.
지금도 엄마 집 어느 한쪽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을 제기는 이제 엄마의 헌신을 요구하는 물건이 아닌 엄마의 생활에 빛을 발하는 엄마의 물건이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꺼내 쓰는 게 다인 제기는 엄마와 우리들의 만남이 처음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일 년에 한두 번 빛을 발하는 게 다인 제기는 엄마 삶에 존재했을 갈등이 사라지고 결국 평온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엄마는 제기를 보면서 힘들어 한숨 쉬지 않고 가슴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