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그릇

by 고도리작가

아빠도 이제 늙었다.

최근에 갔던 유럽 패키지여행에서 "우리 팀 최고령자가 75세라던데 도대체 누구냐?"며 알아내려는 사람들의 시선이 재미있었다고. 결국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알아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밝히니 놀라던 사람들의 표정이 즐거웠다고 한다.

이런 상황들이 즐거운 걸 보니 아빠도 이제 늙었다.

아빠는 집안 내력과 본인 특유의 부지런한 성격과 운동을 즐기는 취향이 결합하여 도저히 지하철의 노약자석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자랑하고 있다. 일반 좌석에 자리가 있어도 굳이 노약자석에 앉아 앞에 서 계신 어르신이 아빠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일어나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을 때 "왜요? 제 나이가 70이 넘었어요"라고 말하면 깜짝 놀란다고 무용담 늘어놓곤 한다.


정말 아빠도 이제 늙었다. 그렇게 건강에 자신 있으면서도 최근엔 치아가 안 좋아졌다며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가장 안 좋은지, 그래서 예전에 좋아하던 것을 이제는 못 먹는다는 등 치아와 관련한 상세한 스토리를 풀어놓는다.

"아빠 뭐 먹을 때마다 아프면 안 되지. 내가 돈 드릴 테니 치아 새로 씌우세요" 하니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좋아한다. 아빠가 정말 늙긴 늙었나 보다.



애증(愛憎) 사랑과 미움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느끼다니 쉽게들 쓰는 말이지만 살면서 이런 감정이 어디 쉬운가?

내 삶에 이 모순된 감정의 유일한 대상이 아빠였다.

아주 어릴 때는 아빠를 무턱대로 사랑했고

조금 어릴 때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났고

조금 커서는 아빠에 대한 애증으로 힘들었고

이제야 조금씩 아빠를 이해한다.


아주 어릴 때는 돌아가신 엄마의 병원비로 남은 재산을 모두 쓰고 돈 벌어 오겠다며 우리 남매를 할머니 집에 맡긴 후 가뭄에 콩 나듯 들르는 아빠를 목 빠지게 그리워했다. 조금 어릴 때는 딸을 위해서라면 새치기도 마다하지 않는 아빠가 싫었다. 왜 새치기를 하느냐는 젊은 사람의 항의를 받고도 여기가 내 줄이라며 뻔뻔하게 우기는 아빠가 창피했다. 왜 우리 아빠는 저렇게 뻔뻔하고 무식할까? 갓 스물을 넘겨 성인이 된 나는 여전히 아빠가 창피했지만 그래도 어른이라고 가끔 아빠가 불쌍하기도 했다.

조금 더 커서 자립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낙담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의 삶의 무게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며 아빠를 조금씩 이해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어느 날 갑자기 번개에 맞은 것처럼 깨달아 버렸다.

특별한 사건이나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선물처럼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그 날 주차를 하기 위해 잠깐 차를 세운 곳은 운전석 쪽이 그늘져 있었다. 조금 후진하면서 주차 위치를 조정하는데 내 앞으로 쏟아진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그 눈부신 햇빛은 천사의 축복이었을까?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을 걷어낸 듯 순식간에 깨달았다.


아빠는 아빠의 그릇이 넘치도록 노력했다는 것을

그리 크지 않았던 아빠의 그릇이 넘칠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것을

매번 자기 방식대로 사랑했던 아빠의 그릇은 이미 넘쳐버렸다는 것을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가족만을 위해서 산 아빠였는데, 나는 좀 더 괜찮은 아빠를 기대했다. 오빠가 저리 방황하는 것도 엄마에게서 조금씩 아빠 모습이 엿보이는 것도 모두 아빠 탓이라도 원망했다.





자기 방식대로만 사랑한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사랑이다.



아내를 잃고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젊은 날 아빠의 녹록지 않은 삶의 중심에 우리가 있어 지금의 내가 가능했다는 것을 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 날 아빠가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아빠의 현명한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의 고통을 한 순간도 겪어보지 않은 나는 아빠를 평가할 수 없다.

평생 사랑한 자식이 자신을 원망하는데도 그 사랑을 멈출 수 없는 부모의 깊이를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전에도 분명히 있었을 하늘의 축복을 매번 지나치다가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하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었던 거다. 그 날부터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어느 날 내가 자주 가는 국밥집에서 우연히 아빠를 만났다. 나는 식사를 마치는 중이었고 아빠는 이제 들어오셨다. 운동삼아 도서관에 자주 오시는데 그날도 근방에 왔다가 식당에 들른 것이리라.

금방 일어나야 했던 나는 아빠 식사값을 미리 계산하고 용돈을 조금 쥐어드리니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좋아하신다.

아빠도 늙었다. 이제 더 이해하고 아낄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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