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착한 사람 콤플렉스
호의가 지나치면 호구가 된다.
나에겐 콤플렉스 하나가 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조직생활을 하면서 모나지 않고 무난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공기업 특성상 성실하고 무난한 직원들이 많고, 둥글둥글 살려하다 보니... 아무튼 그렇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며 그렇게 순둥순둥 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조직이 커 말도 많다 보니 더 그러하다. 모든 직장인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지만, 조직이 커지면 관료화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보니, 인간사회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어느 날 둥글게 살자는 인생관을 흔드는 사건이 생겼다. 설계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게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업무 추진방안에 대한 설계적 검토를 요청한 것이다. 문제는 그 분야가 내가 담당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 분야 담당자는 신규로 돌출된 민감한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탓에 거절했는데,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는 난 거절하지 못했다. 그 후배의 고생과 어려움을 도저히 눈 감을 수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 순간이다.
자신의 업무범위가 아닌 것은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거절해야 한다. 그래야 원망을 듣지 않는다. 이 일의 결말은 설계 이후 이 업무의 전반을 책임지는 방침 수립까지 이어졌다. 그 업무는 도저히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업무범위 밖이었고, 시작 또한 설계까지였다. 하지만 결국 난 업무를 회피하는 무책임한 인간으로 전락했다. 직장생활 20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고, 갈등이었다.
처음부터 도와주는 일이었고, 업무분장에도 없는 추가 업무였다. 나의 오지랖으로 빚어진 선의의 업무였는데, 최종 책임까지 지지 않기에 선의는 사라지고 원망만 듣게 되었다. 한 달여 가까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선의로 시작한 추가 업무였다고, 여기까지 해 준 것도 오버였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이야기는 선의든, 추가 업무든 중요하지 않다고 한 김에 마무리까지 해야지. 그렇지 않아서 갈등을 야기한 장본인밖에 안된다고, 그렇게 된 거라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형국이었다. 호의가 지나쳐 호구가 된 상황이었다. 다 내 탓이다. 작은 거절 하나를 못해 큰 갈등을 일으켜 버렸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 덕분이다. 이건 옳지 않다. 거절의 미덕도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한다. 유독 공동체 의식이 강한 대한민국엔 다양한 착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건 미덕이요, 품앗이요, 나눔이며, 우리였고 신뢰였다. 하지만 요즘 분화된 사회 안에선 조금은 달라졌다.
마음을 상대가 알아줄 때 나눔과 감사, 만족이 있는 것이지. 한쪽만 생각하는 마음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호구이자 어리석은 바보다. 내가 마음을 내면 상대도 당연히 알아줄 거라는 동화는 깨져버렸다. 물론 바라고 돕지는 않았다. 그저 교감하는 마음이면 충분했던 나였다. 서로 아끼고 감사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이제 선의는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임을 배우게 되었다. 직장생활 20년 만에. 더 이상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거절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는 말아야지라고 다짐한다. 사람 냄새를 좋아하는 데, 참 씁쓸하다.
결국 업무는 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지만 상처뿐인 승리였고, 쓰라린 패배보다 못한 승리였다. 처음 잘못 끼워진 단추는 결국 다시 풀어서 꿰어야 한다. 처음에 바로 잡으면 쉽지만, 그게 싫어 미루다간 더 큰 에너지를 들여 바로 잡게 된다. 인생이 다 같은 이치임을 또 깨닫는다. 거절할 땐 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풍파가 밀려온다.
그래도 서로 돕고 믿고 따뜻하게 살고 싶은데,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분화되고 개인주의화돼가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독불장군처럼 혼자 모든 걸 감내하며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도 살아보면 타인의 온기가 필요한 게 인생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와 눈빛, 미소 짓는 인사가 가끔은 산다는 즐거움과 행복을 주던데, 올드한 나만의 생각인 것일까?
갈등의 장본인보다 더 곤욕을 치른 부장님께 죄송하다 사죄하며, 두 번 다시 오지랖 부리지 않겠다 말씀드리니 '에이, 설마' 하신다. 깊은 마음을 알아주는 상사와 근무하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정말 둥글둥글하게 거절할 거다. 호의가 지나치면 호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