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님의 에세이다.
빨래 널다가 보게 된 유퀴즈에서 혜자 님을 만났다. 그냥 한국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배우로만 알았는데, 유퀴즈에서 만난 그녀는 소녀였다.
미군정시대에 재경부 장관을 한 아버지를 두어서일까? 한없이 맑고 순수한 소녀 같은, 세상물정 모르는 여린 감성의 그녀를 보고 마음이 살랑거렸다.
'나이가 80인데 어떻게, 저렇게 나이 드실 수 있지?'
너무 부러웠다. 나도 혜자 님처럼 나이 들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알고, 행복해할 줄 알고, 모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어른으로.
그녀의 책. '생에 감사해'는 유퀴즈에서 본 혜자 님의 목소리로 읽어 내린 책이다. 말투가 글로 옮겨져 있어, 글을 읽으면 그녀의 음성이 자동 재생된다.
그녀의 생이 그녀가 연기했던 작품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 책은, 마치 소설을 읽는 기분이기도 하다. 여느 연예인 에세이와는 격이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은 머리에서 나오는 가벼움이 아닌, 그녀의 삶으로 증명된 진실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든 두 가지 생각.
1. 혜자 님은 텅 빈 존재 같은 연기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 살았고, 삶 자체가 드라마 같다. 그녀에게 일상은 없다. 오직 캐릭터로서의 삶만 있는 거 같다. 하나의 인물을 담았다 보내고, 다른 인물을 담아내고. 계속 반복된다.
그녀는 연기자로 태어났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시는 분이다. 그녀의 일상도, 모든 것을 비워내고 있는 삶 자체도 드라마 같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책 속에 실린 그녀의 눈은,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실제감을 준다. 봉준호 감독도 그 신비로운 눈을 통해 영혼을 보았다고 말할 만큼, 뭔가 깊은 우물 같은 느낌이다. 깊이를 알지 못하는 텅 빔 같은.
2. 연기자는 삶의 깊이가 남다를 수밖에 없겠다!
그냥 배우는 직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수많은 역할을 연기하며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다양한 삶을 살아보는 배우는, 인생의 깊이가 깊어질 수밖에 없겠다 싶다. 그 모든 감정들을 소화해 내면서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내 안에서 깨어날까?
특히, 최고의 작가가 영혼을 갈아 써낸 주옥같은 대본을 백번을 읽고, 외워 발화하는 과정이. 부러워졌다. 타인의 응축된 지성을 짧은 시간에 진액으로 흡수할 수 있으니. 지적이지 않을 수가 없고, 삶이 풍성해지지 않을 수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혜자 님은 맑음, 고움, 그리고 감사. 저리도 소녀같이 나이 드셨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젊은 배우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생의 의미와 진지함을 지나 자신마저 비워내 버린. 삶 자체가 아름다운 느낌. 이 보다 더 배우답다 말할 수 있는 게 뭘까?
이 책은 취향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난 좋았다. 혜자 님이 부럽기도, 멋지기도, 존경스럽기도, 소녀 같기도 하면서, 모든 것이 감사한 그녀가 좋다. 한 번은 살아보고 픈 삶이다. 딱 한 번만.(힘들 거 같아. 어후~)
나도...
정말 소녀처럼 나이 들고 싶다.
봄기운에 가슴이 설레고, 파란 하늘을 자주 올려다 보고, 눈이 부신 햇살에 미소 짓고, 몽글몽글 솟아난 꽃봉오리에 자연의 경이를 느끼고, 지나가는 들고양이와 눈싸움하면서.
예쁜 젊음을 볼 줄 알고, 지금 나에게 만족할 줄 알고,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할 줄 아는 그런 나이 듦이고 싶다. 소녀 같은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