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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Dec 01. 2017

홀든 4할, 포그 4할, 라스콜리니코프 2할

조르바는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문신으로 새겨버렸다

영화와 소설은 몰락한 나라도 언제나 두 팔 벌려 받아주는 세계였다. 


나의 유년기는 모두 현실 이외의 세상에 더 많은 비중이 할애되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사춘기 무렵부터 사람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책과 영화에 빠진 시기와도 맞물린다. 가까운 친구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만 두고 그마저도 마음을 다 열지 않았다. 책 표지를 열면 펼쳐지는 세계, 영화를 재생하면 펼쳐지는 세계에 빠져들었고 거기서 살았다. 영화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세계가 있었다.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이면을 보여주었다. 평범이라는 겉모습에 가려진 뭉그러진 내면 같은 것. 혹은 몰락하고 타락한 사람도 다루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은둔 속에 가두기로 한 사람, 숱하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 집창촌에서 태어나 그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 영화와 소설은 그런 것을 다루었다. 일상에서는 쉽게 알 수 없는 타인의 내면이나 내 인생이 한 번뿐이라 알 수 없는 타인의 삶 같은 것들. 


<아비정전>


얼마 전 직업흥미검사에서 휴머니즘 지수가 높게 나왔다. 실제 관계보다는 영화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보고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애에 관심은 많지만 실전 경험은 없다고나 할까. 관계에 회의적이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나는 친구와 깊은 얘기를 육성으로 하는 것보다는 영화와 소설 속 인물과 글과 영상으로 이야기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내면에 더 탐닉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끊임없이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나한테 영화는 그런 존재였다. 함께 빠진 소설도 그랬다.
세상과 감정을 배우는 창이었다. 


나한테 영화는 그런 존재였다. 함께 빠진 소설도 그랬다. 세상과 감정을 배우는 창이었다. 이런 유년기를 보냈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를 잘 가꿀 리 만무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겉으로만 친할 뿐이고 절대 뭉그러진 내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다. 만남의 목적(예를 들면 동호회나 동아리, 학교, 직장 같은 소속/공동체)이 달성되거나 기한이 끝나면 인연도 그걸로 끝이었다. 목적이 있어 모인 모임의 기한 내에는 그래도 사람들과 잘 지내는 척을 했다. 인연을 끊는다기보다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알기 때문에 공들이지 않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 영화가 끝나면 소설과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은 거기서 멈추는 것처럼, 언제고 다시 이야기를 열어보아도 그 삶이 다시 반복되는 것처럼, 나에게 관계는 "그다음"이 없었다. 그래서 공들일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치고 나는 꽤 많은 모임에 소속되었었다. 직장도 여러 군데 몸담았었다. 그 기간은 모두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보려 노력했던 것 같다. 나도 외향적이고 대범한 사람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싶어서. 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나는 점점 더 울타리 속으로 웅크렸고 그런 나를 꼬옥 응집시켜서 더 독하게 나를 옥죄었다. 


너, 어두운 너, 사람들과 만날 때는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돼. 

울타리 속에 숨어 있어.


영화와 소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을까.

외향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사람들과 더 교류하면서 힘을 얻었을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 4할, '달의 궁전' 마르코 스탠리 포그 4할, '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 2할. 

내가 내 등을 밀어 궁지로 몰아가는 변두리의 인물이다.

고칠 수 있을까. 고쳐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을 개선해야 하면 하는 '문제'로 상정하는 잣대는 누가 만든 것이고 누가 그 잣대로 판단하는 것일까. 나일까, 세계일까.


이번 생에 조르바는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타투로 새겨버렸다.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기억이라도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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