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소강 Mar 13. 2018

나는 왜 여성학에 관심 많은 여자가 되었나

가부장적 가정 환경이 페미니스트를 만든다


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사고방식이 비뚤어졌지 모르겠다.

인스타툰 '며느라기'를 보고 나서 며느리로서 반 평생을 살아온 엄마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결혼 후에 며느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다 언성이 높아졌다. 엄마는 결혼 하면 시댁에 맞출 줄 알아야 한다며 '며느리'라는 역할에 맞는 순종적 자세를 요구했다. 꼭 결혼에 쓰지 않더라도 '순종'이라는 단어를 정말 싫어한다. 단어 안에 종속관계와 위계질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는 결혼이 곧 남편의 가족에 종속되는 제도가 아니라고 반박했고 엄마는 혀를 내두르며 말씀하셨다. "내가 널 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사고방식이 비뚤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유야무야 사회의 피해자

대한민국 세대차이의 극명한 현실을 살고 있는 20대이다. 20대 후반 미혼 여성이라고 해야 좀 더 명확한 범주화가 되겠지? 집 밖에 나가면 20대 후반 미혼 여성이라는 타이틀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를 문제 삼는 것이 문제인 요즘이다. 요즘은 카테고라이징에 불평등한 젠더 의식을 뒤집어 씌우는 것을 금기하다시피 하고 있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나로서는 20대 미혼 여성이 사회에서 얼마나 취약체로 살아왔는지를 체감하고 있으며 지금은 얼마나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를 깨닫고 감탄하고 있다. 퇴사할 때 성희롱을 고발하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때 피해자인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입장이 된 게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난다. 작년만 해도 성희롱 고발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이나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는 말 같은 끔찍한 폭력 앞에 무릎 꿇어야 했었다. 성희롱을 고발한다고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나? 신고하고 나면 팀을 재배치 받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았다. 퇴사하지 않았다면 팀을 옮기는 사람은 내가 되었을 것이다. 팀장도 거기에 동의했을 것이고. 성희롱의 가해 여부를 떠나서 팀의 실적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은 말단 사원인 내가 아니라 가해자인 상사였기 때문이다. 그게 회사의 논리이다. 퇴사한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더러우니 내가 피하자는 식으로 뛰쳐나온 방식은 후회된다.


나는 왜 여성학에 관심이 많은가

나는 20대 후반 미혼 여성이다. 여성학에 관심도 많다. 여성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더라도 고등학생 때부터 관심이 많았고 여성학과 여성주의 문학에 대한 강의도 여러 번 들었었다. 성차별에 민감하며 특히 미디어에 만연한 성차별에 매우 반감이 많았다. 학부 시절 쓴 소논문이나 에세이 중 여럿은 미디어가 왜곡된 젠더의식을 주입하고 있다는 비판(솔직히 비난.....)적인 글이었다. 


신입생 때도 남자 선배들이 사주는 밥을 얻어 먹기 싫어서 불가피하게 얻어 먹더라도 내가 상대방에게 일부러 더 비싼 커피를 사주곤 했다. 그들은 나를 더치페이 할 줄 아는 '신여성'이라고 불렀었다. 그때는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얻어 먹는 자리는 자연스럽게 피하게 됐다. 대학생 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 나는 독일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군인이던 그는 귀국한 나에게 말했었다. "선임들이 해외에 나갔다 온 여자친구를 뭘 믿고 만나냐고 했지만 난 너를 믿어." 그 말 뒤에 담긴 '확신을 요구하는' 무언의 폭력을 나는 기억한다. 그 말에 그와 크게 싸웠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단정지었고, 자신보다 소위 '스펙 좋은' 여자친구를 열심히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나를 유별난 여자 취급하던 그들을 나는 잊지 못한다. 불과 2010년대 초반 이야기이다.


성평등에 대한 내 시각을 다시 정비하고 있는 요즘 내가 왜 어린 시절부터 여성학에 관심이 많았는가에 대해서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꽤 오래된 가치관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뒤져보면 된다. 내가 차별에, 특히 성차별에 민감한 가치관을 갖게 된 원인도 성장 환경에 있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13 reasons Why)> 스틸컷


딸 둘에 아들 하나? 박복한 둘째딸

나는 위로는 언니 아래로는 남동생이 있는 둘째딸이다. 우리 부모님은 조부모님을 모시고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야말로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나는 그나마 자유분방하게 자랐지만 차별에는 숱하게 노출되었다. 자유분방이라고 쓴 것은 친구들 사이에는 흔했던 통금이 없었던 것이나 진로를 스스로 선택한 것 등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자유분방이라고 쓰고 방임이라고 써야할지도 모른다. 나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집안 분위기였으니까. 언니는 첫째여서 사랑을 받았고 남동생은 어렵게 얻은 아들이어서 사랑을 받았다. 그럼 나는 뭐냐고? 계획에 어긋난 아이였다. 아들을 낳았어야 했는데 어쩌다 딸이 태어난 것이다. 첫 돌 사진에 나는 남자 아이가 입는 도령 한복을 입고 있다. 많은 둘째 딸들이 돌 사진이 없거나 (잔치씩이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있어도 나처럼 남자 아이 한복을 입고 찍었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언니는 언제나 새 것을 사서 썼고 나는 언니가 쓰던 것을 물려 받았지만 남동생은 남자 아이니까 그에 맞는 새 물건을 샀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상처 받았던 장면이 정말 많이 떠오른다. 용돈이든 학용품이든 반찬이든 언니는 언니라서, 남동생은 남자애라서 좋은 것을 취했다. 나는? 있으면 그만,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무조건 아들이 최고

특히 할머니는 정말 대놓고 차별을 하셨다. 할머니도 가부장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도 할머니는 나를 정말 힘들게 하셨다. 가족들을 원망하고 방황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말 끔찍한 사춘기를 보냈다. 여성인 나를 힘들게 한 주체가 똑같은 여성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성장기를 보냈으니 내가 차별에 민감할 수밖에. 공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고등학생이 되자 차별을 받는 상황을 판단할 줄 알게 됐다. 고3 때 온가족이 나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때의 나는 그 관심이 위선이라고 생각하고 더 엇나갔었다. 엄마가 많이 속상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반항기 많은 딸"로 명명되었을 뿐 우리집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고3 때 남동생은 중학생 무렵이었는데 할머니는 수능 준비하는 손녀딸은 공부고 뭐고 명절에는 무릇 전을 부쳐야 하고 귀하신 손자는 부엌에 발도 못들이게 하셨다. 손주를 그렇게, 그렇게 아끼셨더랬다. 우리 할머니는 그래서 명절이면 내게 칭찬을 많이 하셨다. 네가 송편이나 만두를 잘 빚으니 이건 네가 해라, 네가 설거지를 해야 깨끗하더라, 청소건 음식이건 네가 하면 다 잘한다, 등등. 머리가 크고 난 뒤 나는 할머니의 전략을 알았지만 속상해서 모른 척했다.


30대인 언니는 미혼이고 비혼주의자이다. 나는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20대 후반이고 미혼이다. 할머니 입장에서 과년한 딸들이 시집도 안 가고 집에 있는 것은 큰 죄라도 되는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 그냥 시집을 보냈어야 한다, 대학 공부를 괜히 시켜서 시집을 안 간다고 하신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랐을 아빠도 다르지 않다. 엄마는 조금 다른데, 딸들이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업과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렇지만 '조금 다를' 뿐 맥락은 같다. 언젠가 엄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왜 친구 딸들은 시집을 잘도 가는데
왜 나는 딸이 시집가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니?

자식이 결혼하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무척 기쁘겠지만 그렇다고 그 기쁨을 위해서 내가 결혼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적령기'라고 해서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임기 여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출산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불법도 아닌데 부모님 세대는 그걸 불법에 가깝게 인지하신다.



할머니와 엄마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일 뿐

나는 할머니와 엄마가 가부장제에 세뇌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러나 길게는 80년 가까이 세뇌된 가치관을 고작 나 한사람이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목소리를 낸다. 단 1퍼센트라도 내 가치관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이야기 한다. 


각자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두 여자 모두 젠더 의식의 피해자이다. 평생을 남편과 아들의 뒷바라지를 해 온 여성의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시집이 법이고 남편은 하늘이고 출산은 의무라고 세뇌 받아온 여성의 삶을 생각한다. 전쟁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하고 무엇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고된 삶을 생각한다. 베이비 부머 세대에 태어나 '더블케어'의 늪에 빠진, 아들을 낳아야 큰 며느리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세뇌 받아온 우리 엄마의 숨막히는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답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 지독한 세뇌와 억압과 폭력은 내 세대가 끝내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내 세대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가부장적으로 치우친 가치관을 이제서야 고르고 평등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성장환경에서 성차별로 생긴 상처는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우리의 딸들에게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열심히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 바로 지금, 나부터 그래야 한다. 


@pixabay


Wait, Are we allowed to do that?

영화 배우이자 영화 감독인 그레타 거윅의 인터뷰 중 한 구절을 인용한다. 


 At the South by Southwest Film Festival in 2006, her senior year, she saw a film directed by a woman around her age. “I thought, Wait, are we allowed to do that? Who told you you could?” And then she realized: “Nobody told her. She was just gonna do it, like the guys were doing it.”
_ <How Greta Gerwig Is Leading by Example>, appears in the March 12, 2018 issue of TIME. 


"아니 잠깐만, 여자도 영화 감독을 해도 되는 거였어?" 


이 대목에서 소름이 돋았다.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데, 여지껏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소름이 돋았던 이유는, 나도 그런 적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의식 중 세뇌 받은 가치관이 내 안에도 많이 남아있다. 그러니 더욱 민감하게 굴어야 한다. 유별나고 까칠하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우리 세대에서 끝내려면.






* 표지이미지: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2016) 공식 스틸컷 from daum movie

* 글에 활용된 이미지: <루머의 루머의 루머> 공식 스틸컷 from netflix, 'We can do it' 포스터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는 언제나 예민한 사람의 몫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