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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Mar 30. 2018

팔자 센 여자에게 애를 낳으라굽쇼?

90년생 백말띠 여자의 출산에 대한 피상적인 생각



속설에 매몰된 "90년생 여성"


여아 선별 낙태에서 비롯된 극심한 성비 불균형은 28년 뒤 저출산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인구학자인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의 초(超) 저출산은 1990년에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90년대 태어난 이들이 가임 연령에 접어들지만, 아이 낳을 여성 숫자가 큰 폭으로 줄어 출생아 수는 계속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출처: 중앙일보] 역대 최악 성비 ‘116.5’ … 1990년생 백말띠의 비극 (2018/02/03) 기사 전문



90년생 여성이 저출산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사들이 많다. 1990년은 백말띠 해였다. 역대 최악의 성비를 기록한 해이기도 하다. '백말띠 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는 이유로 여아를 선별해 낙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자 팔자가 사납다' 혹은 '여자 팔자가 세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자는 왜 팔자가 세면 안 되는가? 팔자가 세다는 말은 왜 '여자'라는 성별 앞에 붙었을 때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일까? 백말띠 남자는 팔자가 세도 괜찮다는 것일까?



팔자가 세다는 말은 팔자가 사납다, 박복하다, 기박한 운명이다, 운이 나쁘다 등으로 다시 쓸 수 있다. '팔자가 센 여자'의 전형은 근대소설에 주로 등장한 인물로 예를 들면 '과부'이다. 인생에 굴곡이 많고 고생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 온순하고 평범한 전형적인 여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기가 세고 드세서 자기 팔자를 자기가 깎아 먹는 여자로 그려진다. 유독 여성에게만 그 기박함이 부정적인 의미로 부여되는 것 같다. '똑똑한 여자는 팔자가 세다'라는 속설도 있다. (찾아보면 여자가 ~ 하면 팔자가 세다는 형태의 속설들이 정말 많다.) 이 속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결론 도출이 뻔하다. '멍청하거나 배우지 않은 여자가 (남자) 말을 잘 듣는다 혹은 온순하다'라고 역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여자 팔자가 세다'라는 의미는 전형적인 젠더와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여성을 깎아내리는 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박완서 소설어사전>에서 '팔자가 사납다'의 뜻풀이가 되어 있다. 예문에는 팔자가 사나운 주체를 여성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소설가가 만들어낸 젠더의 전형이 아니라 전근대 사회에 만연한 속설이다.



1990년에는 그래서인지 최악의 성비를 기록했다. 그러나 저출산이 계속되면서 '저출산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은 90년생 여성을 마지막 희망이라고 칭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팔자가 사납다고 기피하던 여성이 이제는 저출산의 희망으로 추앙(?)받다니 기가 막힌다. 팔자가 사납다고 수군대던 사람들이 이제는 너희가 희망이니 출산율을 높여달라고 하는 지경이라니. 심지어 아직도 무슨 띠 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이 회자되는 사회에서.




팔자 센 여자에서 저출산의 희망까지


나는 90년생이고 여성이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기에 '여자'라면 지녀야 할 젠더의식을 강요받았지만 그만큼 저항도 많이 했다. 무의식 중에 심긴 것들을 지금도 여전히 게워내려고 노력 중이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던 시절에 나와 말다툼을 하던 엄마는 홧김에 내게 '너를 낳지 않으려고도 했었다'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역시 '백말띠 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고 해서. 게다가 나는 예의 그 '고집 센 성씨'까지 갖고 태어났으니 팔자가 셀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시며. 그 말에 담긴 뜻은 '이럴 줄 알았다, 이렇게 고집 세고 제멋대로에 얌전하지 않은 여자애가 태어날 줄 알았다'였을 것이다. 그 말은 예민했던 내게 큰 상처가 되어 지금도 떠올리면 귓전에 울린다. 그러나 엄마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엄마는 그럼에도 나를 낳아 사랑으로 키워주셨다. 그 역시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자란 여성일 뿐이다. 잘못은 여성에게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젠더의식을 덮어 씌우고 강요해 온, 그 지긋지긋한 남아선호 사상과 가부장제에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최근 <82년생 김지영> 소설을 남성 편으로 미러링한 <90년생 김지훈>이라는 비공식 소설이 나왔다고 한다. 오호라? 남아선호 사상에 여자 팔자 속설 콤비로 최악의 성비를 기록한 1990년 말인가요~? 남성도 물론 젠더의식으로 피해 입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내 남동생을 봐도 그렇다. '남자라면 이래야지'라는 말들에 강요받은 일도 분명 있다. 물론 그럼에도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은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네들의 어머니가 그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 그러나 지금은 누가 더 피해 입었고 힘들었는지 비교해가며 싸우는 데만 머물어서는 안 된다. 무의식 속에 주입된 잘못된 사상과 인습을 없애고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90년생 여성이 '저출산의 마지막 희망'이라니. 아직도 여성을 출산의 의무를 지닌, 수단으로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래, 소위 "팔자가 사나운 여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아이를 낳으라는 말인가? 내 팔자를 책임질 수도 없으시면서? 팔자가 사납다면서요? 여자 팔자 사납다는 의미에는 남편복에 자식복 없다는 말을 꼭 갖다 붙이면서 결혼하고 출산하라니요? 그렇다. 여자는 팔자가 세도 아이는 낳아야 하는 것이다.


할머니와 엄마에게 물었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이를 낳으면 뭐가 좋으냐고. 등이 굽고 늙은 몸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육아를 하는 할머니에게,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 매년 겨울이면 산후풍을 앓는 엄마에게, 자식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느라 당신 몸은 챙기지 못한, 당신 삶은 돌보지 못한 할머니와 엄마에게 물었다.

- 여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의무야. 후손을 둔다는 신비한 감동도 있고 아이가 자라나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는 기쁨도 있지. 나중에 늙어서 아프면 곁에 자식밖에 없잖아. 

- 근데 그 좋다는 것 중에 나는 없는데? 나를 위한 기쁨은? 

- 나만 챙기려고 들면 애 낳으면 안 돼.


왜 낳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성세대의 대답은 뻔하다. '미래' 세대에 줄 수 있는 자산에 대해, '미래'에 얻을 추상적인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금의 나는 없다. 여성으로서 즐길 수 있는 다른 즐거움은 마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만약 내가 남자이고 할머니와 엄마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두 분은 뭐라고 하셨을까? 뭐, 답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여자인 내가 물었을 때와 달리 '아직 급할 거 없다'라고 하셨겠지.)


그러니까 '내가 얻을 수 있는 당장의 즐거움'은 없다. 나의 젊음을 희생하고 새로 자라나는 생명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20년 간 살라는 주문이다. 나의 선택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 살아보니 세상은 힘든 곳이다. 게다가 미래마저 밝지 않다. 그런 미래를 과연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이 맞는가?

- 동물도 새끼를 낳을 수 없는 환경이라고 판단되면 낳지 않는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개체수를 줄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저출산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환경이니 당연한 결과인 것이 아닌가?

- 과연 저출산을 탈피하기 위한 '환경 마련'이 출산 수당을 지급하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지? 과연 단순히 그것만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답해 보면 답은 이렇다.


아이를 낳으면 자신을 위한 시간은 당분간 포기해야 한다. 적어도 20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새 생명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출산과 육아를 하는 것이다. 감수할 수 없고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 의무가 아니니까. 


출산과 육아는 개인의 선택이다. 국가나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이고 내 몸이니까 판단도 내 몫이다. 누구도 선택에 대해 강요할 수 없다. 



물론 이 글의 논점은 출산과 육아가 온전히 여성의 몫이니 여성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 속설이 그렇게 만들었고 미디어가 그것을 더 공고히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전국 가임기 여성 분포 지표를 만든다든지, 90년생 여성이 저출산의 희망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서 마치 저출산의 원인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과 육아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선택하고 함께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의하에 선택과 책임을 기꺼이 하겠다고 하더라도 환경이 여의치 않는 것이다. 저출산의 원인은 모두 알고 있지만 고치지 못하는/않는 것들이 태반이다.




왜 낳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청년들에게도 응답해야 한다


어제자 중앙일보 칼럼 <앞으로도 출산은 늘지 않는다> 중 일부를 공유한다. (기사 전문)

지금까지 정부 정책은 자녀를 낳고 키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대다수 청년은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취업난이 사라지고, 차가 덜 막히고, 오염 배출이 줄고, 집값이 내려가면 좋은 것 아니냐고 묻는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출산이 늘면 좋겠다. 하지만 객관적 지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낳고 싶으니 지원해 달라는 젊은 층뿐 아니라 왜 낳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청년들에게도 응답해야 한다. 

[출처: 중앙일보] [노트북을 열며] 앞으로도 출산은 늘지 않는다 (2018/03/29)


여성이 묻든 남성이 묻든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청년들에게 근본적인 대답은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오로지 결과만 본다. 출산율 숫자 높이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그 출산은 당연히 '결혼'이 전제가 된 출산이어야만 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트랙만 밟은 출산만을 축복하는. 그러나 대관절 지금 남자이든 여자이든 90년생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트랙을 밟는 것'이 가당키는 한가? 운 좋게 그 트랙을 밟았다고 하더라도 출산하지 않을 권리는 있다. 그 트랙을 밟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출산할 권리는 있는 것처럼.


90년생 여성이 저출산의 마지막 희망이라니. 90년생 여성이 이렇게 주목 받는 것은 '백말띠 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세다'라는 속설로 주목 받은 이후 처음일 것이다. 저출산의 시작부터 저출산을 끝낼 희망이라는 타이틀까지 왜 90년생 여성에게 쥐어주는가? 이들의 억센 팔자는 과연 누가 만들고 있는 것인가? 


90년생 여성들은 나와 비슷할 것이다. 넌 팔자가 셀 테니까 어디가서든 그런 소리 듣지 않게 조신하게 살라고 교육받고 자랐을 확률이 높다. 억압은 순종을 위한 것이나 필시 반발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타칭 팔자가 센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도 많으시다. 중요한 것은 몽땅 놓치고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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