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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Mar 25. 2018

새장과 둥지 사이, <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스러운 영화적 시선



(영화 내용 전체가 실려 있습니다.) / 브런치 무비 패스



'그레타 거윅'스러운


그레타 거윅 감독 데뷔작 영화 <레이디 버드>는 사랑스러운 성장영화다. 그레타 거윅의 연출력은 물론 그녀의 재치 있는 각본 재능도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몇 편 보고 인터뷰한 기사를 몇 개 읽은 것이 전부임에도 영화가 끝나자 '그레타 거윅스럽다'라는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레타 거윅스러운 영화'를 정의해본다면 하찮은 일을 하찮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그녀가 주연으로 연기했던 영화 <프란시스 하>(2014)와 <메기스 플랜>(2017)처럼 영화에서 일어난 '사건'은 거시적 관점으로 본다면 아주 하찮은 개인의 신변 변화이겠지만 결코 하찮게 넘어갈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건' 앞에 선 보잘것없는 인간을 '보잘것 있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좋은 영화는 관객에게 손을 내민다. 영화 속 주인공과 당신도 다르지 않음을, 당신의 우주가 결코 작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레이디 버드>도 그렇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고등학교 졸업반인 '크리스틴'이 드디어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는 관문을 앞둔, 누구나 겪는 시기이지만 누구나 똑같이 겪지는 않을 그 시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게 보면 하찮을지언정 한 사람의 내면에서는 결코 하찮지 않고 자신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일 그 시기.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다

누구나 겪지만 

누구도 같은 것을 겪지 않는 시기


미국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새크라멘토'에서 평생을 살아온 자칭 '레이디 버드'인 '크리스틴 맥퍼슨'. 자기 자신에게 예명을 붙이고 그 명칭으로 불리길 원하는 열일곱 소녀다. 지긋지긋하고 지루한 고향을, 학교를, 가족을 가능하면 멀리 떠나 자유분방한 일상을 즐기고 싶어 한다.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푸념하는 '레이디 버드'는 뉴욕에 있는 대학에 가야만 새장 같은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새크라멘토에서 떠날 수만 있다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테러와 총기사건 때문에 새크라멘토 주립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엄마의 주장을 꺾지 못하자 차에서 뛰어내려 버린다. '레이디 버드'는 뉴욕 대학 진학을 엄마 몰래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뉴욕으로 떠나기 전 마지못해 갇혀 있는 동안에는 자신에게 특별한 예명을 붙여주고, 취미로 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연극반 오디션을 보는 등 특별하고 별난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 


대니와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의 '드림 하우스'인 푸른 집은 대니 할머니 댁이었다. 완벽해 '보였던' 남친, 대니
어디서든 홀로 책을 읽고 음악을 하는, 자유롭고 퇴폐적인 매력이 넘쳐 보이던 '카일'. 하지만 레이디 버드에게 상처를 남긴다. (캐릭터 찰떡 같이 소화한 배우 티모시 샬라메..♥)


'첫 경험'도 에피소드 중 하나. 레이디 버드가 만난 아마도 첫 남자 친구 '대니'는 신념이 깊고 성실하며 그녀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하지 못할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대니와 헤어진 후 레이디 버드는 퇴폐적인 매력의 소유자 '카일'을 만나고 그와 최악의 첫 경험을 한다. 레이디 버드는 카일과 친해지기 위해 절친했던 친구 '줄리'를 뒤로 하고 학교 퀸카 '제나'에게 영리하게 접근했었다. 그러나 카일과 제나는 첫 경험이나 처음이자 마지막일 졸업 무도회를 우습게 생각한다. 레이디 버드에게는 큰 의미이자 소중한 경험이 그들에게는 기억나지 않고 따분한 일들인 것이다. 레이디 버드는 자신과 너무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영역에 속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남자 친구가 생기자 잠시 소홀했었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 준 절친한 친구 '줄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으로 떠나게 된 레이디 버드가 뉴욕에 가서 자유분방함의 실체를 체험한 뒤 새크라멘토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레이디 버드와 줄리
짝사랑에 상처 받은 줄리를 찾아온 레이디 버드. 사랑을 착각해 받은 상처를 서로 보듬는다.


'제나'가 자신의 성 경험을 친구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할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줄리'는 진지하게 질문한다. "별 거 아냐, 관계 중에 고모한테 전화가 왔는데도 그냥 했어." "무슨 전화였는데?" "뭐?" "전화 내용이 뭐였는데?" "그냥 고모가 아프다는 전화."


'줄리'는 그런 친구다. 누군가에겐 사소하게 치부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는 소녀. 줄리가 엄마의 남자 친구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 일단 '삼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점, 수학 선생님의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상처받은 점, 친부를 만나기 위해 새크라멘토를 잠시 떠나는 일을 굉장한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점 등은 '줄리'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준다. 레이디 버드는 무도회를 제치고 파티에 가자는 제나와 칼리를 떠나 다시 줄리를 찾아간다.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에서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해줄 인물은 대니도, 카일도 아닌 줄리일 것이다. 자신의 방 벽에다 몰래 적어 놓았던 대니와 카일의 이름은 뉴욕으로 떠나기 전 페인트로 덮었지만 졸업 무도회에서 줄리와 함께 찍은 사진은 영원히 간직할 테니까.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2002년~2003년이다. 레이디 버드가 테러와 관련된 뉴스 기사를 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영화에는 "911 테러 이후 뉴욕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지만"이라고 언급되어 뉴스 장면이 등장한 근거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 뉴스 장면은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레이디 버드에게 일어난 일련의 에피소드들이 테러나 마찬가지로 큰 사건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각본에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그녀가 레이디 버드의 나이였을 때가 바로 그 시대이기도 할 테지만, 굳이 그 시대를 선택한 배경이 있을 것이다. 갇혀 있던 새장을 떠나기 직전인 고등학교 졸업반 1년은 누구나 겪는 시기이지만 그 삶의 한가운데서는 나름의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겪는 시기이지만 누구도 같은 것을 겪지는 않는 시기.



어른들의 새장


'레이디 버드'는 새장을 떠나 자신만의 비행을 하고 싶어 한다. 부모님이 자신을 키우기 위해 든 돈으로 생색내지 못하게 돈을 모두 갚고 마음껏 남자를 만나고 술도 마음껏 마시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가 마주한 어른들의 삶은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레이디 버드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엄마는 언제나 돈타령을 한다. 돈 때문에 철로 옆 낡은 집에서 25년을 살고 있고 아빠의 실직 이후 매달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야간 교대 근무를 서가며 정신병원 간호사로 일한다. 다정하기만 했던 아빠는 몇 년째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에너지 넘치던 연극반 선생님은 눈물연기를 지도하며 자신이 제일 먼저 펑펑 울어 버린다. 카일의 집에서 마주친 암 투병 중인 그의 아버지는 작은 소파에 앉아 애처롭게 잠들어 있다.


최악의 첫 경험 이후 아빠의 우울증 투병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의 졸업무도회 드레스를 손수 수선하는 엄마
드디어 성인이 된 레이디 버드. 그러나 착잡한 표정이다. (영화 <브루클린>(2015)의 스틸컷과 묘하게 교차되는 컷. 시얼샤 로넌은 여기서도 고향을 떠나는 인물을 연기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 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은 레이디 버드는 열여덟 살 성인이 된다. 담배와 성인잡지를 사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며 잡지를 펼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다. 학비에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운전 연수를 받으며 새크라멘토를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떠날 준비를 할수록 새크라멘토에 대한 애잔한 애정이 밀려오는 이유는 뭘까.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새크라멘토의 해 질 녘 풍경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는 것을 엄마와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 품이 지독한 새장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고 보듬어준 둥지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뉴욕으로 떠난 레이디 버드는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자에게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다. 더 이상 예명을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인 것이다. 어디서 출신이냐는 질문에 '새크라멘토'라고 답하지만 상대방은 지역을 모른다. 대충 '샌프란시스코'라고 유명한 지역 이름으로 둘러대버린다. 새크라멘토에서는 종교를 희롱해왔지만 무신론자임을 당당히 밝히는 남자 앞에서 오히려 그를 희롱한다. 술에 취해 응급실에 실려간 크리스틴은 그곳에서 레이디 버드가 아닌 본명으로 불린다. 숙취에서 깨어난 그녀는 바로 옆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년을 바라본다. 한쪽 눈에 붕대를 감은 소년이 크리스틴을 바라본다. 크리스틴은 병원에서 나와 교회로 향하고 그곳에서 왠지 모를 따뜻한 안정감을 느낀다. 뉴욕에서 그녀가 배운 것은 새크라멘토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다친 눈을 붕대로 감싼 소년처럼 그동안 크리스틴은 한쪽 눈으로만 자신의 삶을 바라봤던 것이다. 교회를 나선 크리스틴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새크라멘토의 멋진 풍경을 칭찬하는 메시지를 남긴다. 


"네가 갖지 못한 걸 찾아서 불평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해봐!" 


엄마의 지겨웠던 잔소리에 담긴 속 뜻을 깨닫게 되는 순간. 부모님을 헤아리게 되는, 비로소 두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순간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



엄마가 운전할 때 조수석에 타고 있을 때는 몰랐던, 그저 그 차에서 뛰어내릴 궁리만 했던 '레이디 버드'. 그러나 직접 운전을 해보고 나서 알게 된다. 엄마가 매일 퇴근길에 보았을 새크라멘토의 해 질 녘 풍경이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것을. 운전하는 엄마의 옆모습과 크리스틴의 옆모습이 교차되는 장면은 그래서 가장 인상 깊다. 줄리와 대니와 제나와 카일을 거쳐 어른이 된 크리스틴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무섭고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다. 누구에게나 한쪽 눈의 붕대가 풀리는 시점이 온다. 일부러 감았던 눈 혹은 자신도 모르게 상처 냈던 한쪽 눈을 뜨게 되는 때가.


크리스틴은 방학에 새크라멘토를 다시 찾을 것이다. 오랜만에 줄리를 만나고 가족들과 지지고 볶는 짧은 일상을 보낸 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새크라멘토를 떠날 때마다 비행기 창밖으로 작아지는 새크라멘토를 보며 생각할 것이다. 새크라멘토는 '레이디 버드'의 새장이 아니라 둥지였음을.




'여성 감독'이라는 칭호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스러운 사랑스러운 성장영화이다. 레이디 버드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그 사건 속 대화들을 살펴보면 그레타 거윅이 각본가로서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영화를 전공했지만 남성 감독의 뒤에서 활동했을 뿐이었다. 2006년 한 영화제에서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보고 여성도 감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도 연출을 해도 된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누구도 해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At the South by Southwest Film Festival in 2006, her senior year, she saw a film directed by a woman around her age. “I thought, Wait, are we allowed to do that? Who told you you could?” And then she realized: “Nobody told her. She was just gonna do it, like the guys were doing it.”
(How Greta Gerwig Is Leading by Example, in the March 12, 2018 issue of TIME, 전문 링크 )


오스카 작품상에 노미네이트 된 다섯 번째 여성 감독이라는 수식어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녀도 그러한 수식어로 주목받지 않을 시대를 원할 것이고 그런 시대를 만들기 위해 그레타 거윅스러운 영화를 만들어 갈 것이다.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아는, 하찮은 것을 하찮지 않게 보고 그릴 줄 아는 그레타 거윅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레이디 버드> 연출 중인 그레타 거윅





왓챠 코멘트)

멀리 날아가서 되돌아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법. 내 모습조차도.


공식 포스터)

영화 공식 포스터는 레이디 버드의 옆모습 컷이다. 새를 찍은 사진에는 새의 옆모습이 찍혀 있는 게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컷이다. 그래서 한쪽 눈만 보인다. 제목이 <크리스틴>이었다면 아마 정면을 보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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