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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소강 Apr 12. 2018

예감은 역시 틀렸다

원작보다 나은 영화를 기대했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원작이 훌륭할수록 영화의 허들은 높을 수밖에 없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대해 쓸 때면 매번 '영화가 원작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췄었다. 이는 원작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의 숙명적 과제와 같다. 원작을 기준으로 영화의 평가 잣대도 설정된다.


텍스트를 영화라는 복합예술 장르로 바꿀 때는 득이 되는 부분이 있는 반면 실이 되는 부분도 많다. 잃는 것을 최소로 하고 장르 변형의 장점을 최대로 활용할 때 영화는 원작을 뛰어넘는다는 평을 받을 것이다. 


개인적 의견으로 원작의 주제의식을 더욱 확대한 영화가 원작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의식을 확대하기 위해 결말을 바꾸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변형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장르가 바뀌었으니 영화적 기법을 장치로 활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영화 <토니 타키타니>나 <폭풍의 언덕>처럼) 영화 대비 소설이 독자의 자유도가 더 높기 때문에 영화는 그 자유도를 상징을 더하는 이야기 변형이나 촬영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기에 원작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소설은 작가 혼자 쓰지만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합작하는 작품이다. 주제의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두 시간 남짓 러닝타임에 맞도록 각색과 연출, 편집을 해야 하고 캐스팅과 로케이션에도 신경 써야 한다. 소설엔 없던 음악이나 카메라 앵글(시점)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 게다가 원작을 이미 읽은 독자들(잠재 관객들)까지 만족시켜야 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중에서도 소설을 영화화하는 가장 첫 번째 단계인 각색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창작보다 오히려 원작을 각색하는 각본이 훨씬 어려울지도.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원작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각본가나 감독의 의견에 동화되기 전에 소설 속에서 마음껏 상상하고 생각할 자유가 생긴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으면 어쩐지 주인공이 영화 속 배우 얼굴로 그려지고 대화가 배우 목소리처럼 들린다. 배경도 어쩐지 영화 속 배경으로 상상이 제한되어 버린다. 원작에서 상상하던 바를 영화에 그려진 모습과 비교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이다. 같은 책을 읽은 타인의 상상을 구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감은 틀려버렸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긴 서두를 썼다.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먼저 읽었고 소설이 훌륭한 만큼 자연스레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그러나, 예감은 틀려 버렸다. 역시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를 만들기란 쉽지 않고 관객으로서 만나기도 쉽지 않다. 원작 소설에 매료된 독자를 관객으로서도 만족시키는 더 어려운 법이니까. 


원작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2011년 맨 부커 수상작이다.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 2016년 원작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다. 줄리언 반스는 무척 저명한 작가이나 이 책으로 처음 접하게 됐다. 이 소설이 맨 부커상을 받았을 때도 '너무 늦었다'는 평이 있었다고 하는데 책 좀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입장벽이 높은 작가로 통하나 보다. 방대하고 깊은 지식을 소설에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편이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고 한다.







 

원서는 150페이지 정도의 경장편 분량이라고 하는데 작가는 "나는 이 소설이 300페이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책을 다 읽으면 바로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로 다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읽을 때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처음 읽을 때는 무심코 읽고 넘어갔던 장면과 문장들이 결말을 알고 나서 봤을 때는 다시 보인다. 단 한 장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작가가 얼마나 치밀하게 장면과 문장을 구성하고 배치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이야기의 주인공 '토니 웹스터'가 1960년대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학교로 전학 온 '에이드리언 핀'을 만난 장면부터. 토니는 콜린, 앨릭스와 어울려 다니고 있었는데 셋은 손목시계를 손목 안쪽을 향하게 차는 것으로 나름의 정체성(자칭 허세 덩어리)을 갖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역사 시간에 비범한 답변을 하자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접근한다. 이후 넷은 함께 어울리게 되지만 에이드리언은 그들처럼 손목시계를 안쪽으로 차지는 않는다.


시 한 편을 나눠주고 시의 주제에 대해 묻는 영어 선생님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요"라고 말한다.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사랑과 죽음이라고 할까요. 경우를 막론하고,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이죠.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까지도요."

역사 수업 시간에 역사란 무엇인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1부 초반에 나오는 역사 수업시간 장면 자체가 전체 이야기의 복선이자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에이드리언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발화는 결코 그냥 쓰인 것이 아니다.) 1부는 전부 토니의 회상이다. 고등학교 시절과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내용부터, 토니가 베로니카와 사귀고 헤어진 후 에이드리언으로부터 그녀와 만나도 되는지 묻는 편지를 받는 내용,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자살 이후 토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오랜 세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까지. 그의 아무것도 모른 삶은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가 그 앞으로 유산을 남기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2부는 토니가 '자신이 시작했으나 몰랐던' 이야기를 찾아가는 내용을 그린다. 왜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유산을 남겼는지 알 수 없던 토니는 베로니카가 그 답을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녀의 연락처를 수소문한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재회한 후 토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시작했으나 끝까지 몰랐던' 그 사실을 깨닫는다. 2부는 충격적인 반전 사실이 드러남과 동시에 끝난다. 


독자는 토니가 서술하는 이야기를 어느 정도 신뢰하면서 책을 읽게 되는데 2부로 진행되면서 그의 기억과 회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2부 마지막에 '토니만 몰랐던'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이야기가 그의 입장에서 풀어낸 것일 뿐임을 깨닫는다. 서술자가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믿으며 읽은 독자의 뒤통수를 때린다. 사실은 없다. 단지 서술만 있었을 뿐. 사실과 서술은 엄연히 다른 거니까. 소설 이야기 자체도 고등학교 시절 역사 시간의 커다란 변주와 마찬가지이지만 소설의 서술 형식도 그렇다. 역사란 사실보다는 서술에 가까우니 말이다.



'모든 날이 일요일'

아래 문장은 소설 맨 첫 페이지에 쓰인 것이다. 끝까지 읽고 다시 첫 페이지를 연 독자에게 '이제 알겠지?'라고 묻고 있는 것 같은 문장. 소설은 이토록 치밀하다. 단 한 문장도 의미 없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지나가듯 나오는 장면 중 토니가 친구와 식사하는 장면이 있다. 친구의 아들은 밴드를 결성해 '모든 날이 일요일'이라는 곡을 냈다고 했다. 그 밴드의 단 하나의 곡이며 그 곡의 가사도 단 한 문장이다. '모든 날이 일요일'. 토니는 묘비명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수십 년 인생은 묘비명이라는 단 한 문장으로 기억된다. 단 한 문장으로 후려치는 기억의 왜곡. 단 한 문장도 의미 없이 쓰이지 않았다.


묘비명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안 그런가?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책, 임자를 만나다' 코너에서 이 책을 다룬 적이 있다. 고정 패널인 김중혁 소설가는 이 책을 두고 "1부와 2부 사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1부와 2부는 정교하게 짜 놓은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이다. 1부 첫 문장부터 2부 마지막 문장까지 그렇다. 줄리언 반스를 두고 왜 형식주의 작가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나마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지적 허영을 채워주고 형식을 중시하는 그의 전작들 대비 아주 읽기 쉽고 편한 편이라고 한다. 완급조절을 할 수 있는 것도 작가적 능력일 것이다.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책의 형식적인 측면에 더 매료되었다. 오히려 이야기는 반전으로 인해 너무 나갔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읽고 나서 다시 읽으면 더 재밌는 형식(150페이지이면서 300페이지인)이 매력적이었다.  





영화는 소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다른 방향으로 간다

소설과 다른 영화의 방점


그래서 이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당연히 형식적인 부분들을 최대한 살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야기를 옮기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책의 결말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주관적 해석까지 제시했다. 책의 주제는 왜곡된 기억에서 비롯된 회한이지만, 책이 그 후회와 충격을 묵직하게 울리고 끝냈다면 영화는 회한 앞에서 무기력한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보여주었다. 결말 때문에 영화는 책과 완전히 다른 주제의 이야기가 되었다. 주제의식에 있어서 원작과 너무 동떨어진 방점을 찍고 있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카메라 수리점

영화에서 '토니'는 카메라를 수리하고 중고 카메라를 사고파는 일을 한다. 토니가 맨 처음 갖게 된 카메라는 '베로니카'가 준 것이었다. (소설에서 카메라는 단 한번 등장하는 소재다. 토니가 에이드리언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여자 친구인 베로니카를 소개하던 날, 이들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토니가 베로니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었다. 베로니카와 사귀면서 토니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것이다. 40여 년이 지나 노인이 된 토니에게는 아직도 베로니카의 흔적이 남아있다.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후 토니는 그녀와 함께 찍었을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진을 다리 위에서 강 아래로 흩뿌려 버린다.


고장 난 손목시계

영화 속 토니가 젊은 날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베로니카가 "손목시계를 왜 안쪽으로 차고 있어?"라고 묻자 토니는 당황하며 손목시계를 고쳐 맨다. 반전 이후 결말에서 토니의 (이제는 평상시에도 바르게 차고 있는) 손목시계는 멈춘다. 여기서부터는 소설에 없는 내용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손목시계를 톡톡 건드리는 토니를 본 마가렛은 그에게 새로운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토니는 베로니카와의 재회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변한다. 젊은 시절 자신이 보낸 치기 어린 저주의 편지가 그대로 실현된 충격과 회한을 미처 느낄 새도 없이 변한다. 계기는 딸 수지의 출산. 배려심 없고 이기적이던 토니는 상냥하고 사려 깊은 인물이 된다. 집배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딸 수지의 출산과정을 살뜰히 보살핀다.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감독의 주관적 해석일 것이다. 아빠에게 쌀쌀맞던 수지도 토니의 변한 모습에 마음을 연다. 출산 후 수지는 아기와 함께 토니의 카메라 수리점에 방문한다. 새로운 생명을 만난 토니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일까. 고장 난 카메라는 수리하면 되고 멈춘 시계는 새로 사면 되는 것일까.


깔때기는 자유를 뺏는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책의 주제와 정반대로 방점을 찍었을 뿐이지 모호하지 않다. 그러나 원작이 주는 울림을 영화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영화는 결말 때문에 주제의식이 깔때기를 통과하듯 하나로 모아진다. 원작에는 역사와 시간, 후회와 인간의 이기적인 유약함 등 여러 상징적 주제의식이 이야기와 형식에 깔려 있다. 그것을 하나로 모으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서 버린다. 그래서 여운이 길다. 영화는 여기서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해서 명확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원작을 영화화했을 때 원작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주제의식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 의미를 더 확대하여 큰 울림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독자/관객 개개인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관객에게 여운을 느낄 자유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니까.






영화에서 좋았던 장면)

베로니카의 집에서 떠날 때 토니는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어머니 '사라'를 되돌아본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장면의 젊은 토니가 현재의 나이 든 토니로 바뀌고, 멀어지는 사라가 은밀하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영화적 기법의 맛. 주제의식은 달라졌어도 배우들의 연기와 편집은 볼만 했다.


왓챠 코멘트)

책은 읽자마자 바로 다시 읽게 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원작이 '고장'과 '오래됨'에 대해 깊이 있게 포착했다면 영화는 고장 난 시계는 새로 사면 되고 오래된 카메라는 수리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원작의 충격과 여운을 방해하는 결말이나 영화로서는 나름 신경 쓰고 나아간 것이렸다. 다만 그렇다면 The sense of an ending이라는 원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완벽하지 않은 기억을 표현한 아웃포커싱 영상과 교차편집,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던 영화.




덧붙이는 이야기)

 

에이드리언은 왜,

에이드리언은 왜 자살했을까?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된 걸까?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하려 애써보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다. 사라가 토니에게 남긴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은 맥거핀일 뿐이고 끝까지 어떤 내용이 담겼었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예민한 에이드리언의 성향과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떠나면서 가끔씩 만날 수밖에 없었던 성장환경으로 추측해볼 뿐이다.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 잠시 묵었을 때, 사라가 했던 사소한 몸짓과 말투로 그녀가 에이드리언에게 어떻게 비쳤을지짐작해볼 뿐.


바뀐 제목에 대해

국내 출간 책과 영화의 제목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평론가와 김중혁 소설가 모두 바뀐 제목을 탐탁지 않아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다분히 마케팅적인 제목이고 '예감은 틀리고야 만다'라는 책의 주제와 정반대 되는 것이지만 일종의 반어법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확신한 혹은 맹신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예감'이라는 단어란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지.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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