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소거가 필요해 혼자 떠난 제주 여행 (2)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
여행까지도 혼자 하는 걸 좋아하니까.
홀로 도착한 제주. 첫째 날은 날씨가 흐렸다. 구름이 잔뜩 껴서 하늘은 회색빛이지만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 차가우면서도 상쾌한 날씨. 독일에서 지내는 동안 절반 이상은 이런 날씨였다. 이런 날씨면 항상 독일이 생각나면서 그곳의 냄새가 떠오른다. 제주도 섬이라서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제주에서 만난 '독일 날씨'는 바다 냄새까지 섞여 있었다. 누군가에겐 여행하기 싫은 날씨겠지만 나는 이런 날씨를 좋아한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잠시 생긴 틈 사이로 햇빛이 들이치다가도 다시 비가 내리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 내 마음 같아서 좋다. 그리고 흐린 날씨에는 발랄한 척 나를 포장할 필요도 없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용연 구름다리로 향했다. 흐린 하늘 아래서 바다를 보고 싶었다. 용두공원과 용두암이 근처에 있어서 이곳들도 다녀왔다. 용두공원에는 사철나무들과 새 잎을 피운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습한 흙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벤치가 하나둘씩 놓여 있었고 거기에 앉으면 소리가 더 차단돼서 포근하기까지 했다. 용두암은 관광명소라 사람이 다소 많았지만 용두공원은 아니었다. 근처에서 주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날씨처럼 분위기는 차분했다.
필름 카메라로 타이머를 설정해두고 독사진을 찍었다. 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사진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잘 나오면 좋은 것이고 잘 나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용두공원을 뒤로하고 동문시장을 향했으나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고 북적여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야시장이 열려서 간단히 요기만 하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세화 해변 근처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가로등도 하나 없어서 무척 어두웠다. 막 저녁 여덟시가 된 시간이었지만 작은 마을의 거리 곳곳은 이미 깊은 밤 같았다. 저녁 여덟시가 이렇게 어두운 시간이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토록 조용한 시간인지도.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온 토박이에게 저녁 여덟시는 초저녁일 뿐이다. 야근을 하고 있던 시간이기도 했고, 집에서 영화를 봐도 두 편은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밖에 있다면 또 어떤가. 서울의 저녁 여덟시.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밝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밝지 않는다. 시끄럽게 밝다. 거리 곳곳 매장마다 스피커를 문 밖에 설치해서 최신 유행곡을 틀어대는 서울의 밤. 고성방가를 하는 사람들. 나에게 저녁 여덟시는 그래왔다.
제주의 작은 마을의 저녁 여덟시는 적막하고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와 내 발소리만이 거리에 울릴 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니 스텝 몇몇이 라운지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라운지에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파티를 지양하는 조용한 게스트하우스를 골랐는데 최적의 선택이었다. 1인실로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서니 방에는 커다란 창문과 그 아래 놓인 큼지막한 침대, 그리고 작은 탁상뿐이었다. 문을 닫으니 방에는 오직 나 혼자. 그리고 창밖에 고양이 우는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 다시 적막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오롯이 나만을 위한 공간과 시간.
피곤하지만 행복했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몸을 폭 담고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시장에서 잔뜩 사온 귤향과즐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일에 사람에 소음에 치이던 서울살이를 잊을 수 있었다.
서울이 아닌 곳, 그리고 나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는 곳. 적막함이 이상하지 않고 침묵이 용인되는 곳. 제주에서 홀로 맞은 첫째 날 밤은 근 몇 년을 통틀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향인을 위한 1인 여행 패키지가 나온다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순간의 고요함과 행복감을 가방 속에 담아 가지고 가고 싶었다. 가져갈 수 없다면 내가 여기에 스며들어 돌아갈 수 없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