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침묵이 위로가 된다

음소거가 필요해 혼자 떠난 제주여행 (3)

by 소란소강



비자림이 간직하고 있는 것


제주에서 가장 좋은 곳을 꼽으라면 잠시 고민을 하겠지만 딱 한 곳을 꼽을 것이다.

바로, 비자림.


제주도를 자주 가본 것도 아니고 제주의 명소를 모두 가본 것도 아니지만 비자림은 아무 이유 없이 내게 특별하다. 천 년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새천년 비자나무와 돌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히 자란 생명력 강한 비자나무들. 비자림에 가면 내가 작아져서 좋다. 내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든 비자림 안에서는 보잘것없다. 비자림에서는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촘촘히 자리 잡은 비자나무 사이에서 물기를 머금은 공기를 마시고 이파리들 사이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을 받는 것.

비자림의 비밀스런 햇빛들. / 캐논AE1


비자림을 한 바퀴 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처음 비자림을 방문했을 때는 한 바퀴를 슥 돌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찬찬히 보며 돌았다. 걷는 속도를 맞춰야 할 사람도 없고 비위를 맞춰야 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치면서 보지 않는 숲 속의 작은 부분까지 천천히 살폈다. 평일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여행객 한 무리를 보내고 나면 한동안은 숲이 고요했다. 숲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한 순간. 서울에 살면서 숲 속의 고요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눈을 감고 숲의 공기와 소리에 집중했다. 비자림에서 보낸 아주 고요한 나만의 시간은, 아무에게도 말해주거나 알려주지 않고 비자림과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비자림과 함께 비밀을 나눈 사람은 얼마나 될까. 비자림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비밀을 묵묵히 간직하고 있을까.


고요한 비자림은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다. / 캐논AE1




오래 머물고 싶은, 아일랜드 조르바



비자림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후 평대리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을 하나 놓치는 바람에 다음 정류장에 내려 반대 방향으로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했다. 그 정류장에는 제주 할망 한 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기준에 버스 한 정거장은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할망께 평대리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지 물었다. 할망은 아주 친절하고 유쾌한 분이셨다. 내가 가려는 곳을 물어보시더니 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셨다.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정류장 앞을 지나가는 동네 할아버지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셨다(!) 유쾌한 할망 덕분에 바로 버스를 타서 평대리 마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대리는 지난번에 왔을 때도 조용했지만 이날도 아주 조용했다. 초입부터 가지런한 돌담집들이 반겨주었다. 마을 초입에서 마을 끝쪽을 바라보니 바다가 보였다. 평대리를 다시 찾은 이유는, 성게 국숫집과 아일랜드 조르바를 가고 싶어서였다. 성게국수는 지난 여행에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고 아일랜드 조르바는 지난번에 왔을 때 휴무 중이었기 때문이다.


평대리의 돌담집. / 캐논AE1


아일랜드 조르바를 먼저 갔다.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를 함께 운영하는 곳으로 가정집을 카페로 개조한 것 같았다. 턴테이블에 나른한 음악이 흐르고 코바늘로 뜬 코스터와, 책 읽기 좋은 의자와 많은 책들. 카페의 작은 뜰에는 피크닉 매트가 깔려 있어서 뜰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머신이 아닌 드립 커피가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사장님은 묵묵히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고 턴테이블의 엘피판을 바꾸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한 곳에 있었다. 카페를 갈 때도 예민한 편이어서(공공장소를 갈 때 예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이 잘 맞지 않으면 바로 나오기 일쑤인데 아일랜드 조르바는 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음에 제주에 혼자 여행을 다시 온다면 그때는 아일랜드 조르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거라는 결심까지 했다.


아일랜드 조르바 / 캐논AE1


카페의 분위기는 사소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인테리어와 음악이다. 두 개만 봐도 사장님의 취향이 어떤지 감이 온다. 사실 인테리어는 분위기를 결정하는 아주 큰 요소지만, 인테리어는 멋있게 해놓고 음악은 최신 유행곡 메들리를 틀어 두는 곳도 은근 많다.


내가 아일랜드 조르바에 갔을 때는 맥 드마르코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스피커 앞에 LP표지가 놓여있었다. 맥 드마르코의 앨범 <Salad Days>였다. 내 취향에도 꼭 맞았지만 카페 내부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맥 드마르코 다음 선곡은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정규 앨범 <Quiet Is the New Loud>. 두 앨범만으로 카페 분위기는 모두 설명이 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일랜드 조르바는 그런 곳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종일 크로셰 뜨개질을 하고 뜰에 누워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면서 제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곳.


커피도 맛있었고 뜰에 앉아 있으면 제주 바다도 보였다.

아일랜드 조르바의 뜰에서 본 제주 바다 / 캐논AE1


사실 아일랜드 조르바는, 카페 이름부터 끌리기도 했다. 조르바를 당당히 내걸고 있는 곳이라 어떤 곳일지 궁금해서 찾아간 곳이지만 기대 이상의 것을 얻고 왔다. 서울에서는 찾기 어려운 분위기. 찾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한적한 분위기의 공간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제주를 떠나며


조르바를 나서서 성게국수를 먹고 성산일출봉으로 향했다. 성게국수는 겨울에 먹었던 그 맛이 나지 않아서 좀 아쉬웠다. 언니랑 여행을 왔을 때는 추위에 떨다가 우연히 찾아 들어간 곳이어서 더욱 맛있었던 것 같다. 성산일출봉은 겨울에 왔을 때보다 훨씬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봄에 핀 새 잎들 때문에 온통 연둣빛이 만연했는데 겨울에는 잿빛이라 거대하고 웅장해 보였다면 이번에는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아주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었으면서도 매년 새로운 잎들로 새단장을 하는 성산일출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 질 녘의 성산일출봉은 주홍빛과 보랏빛을 받아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차창밖으로 멀어지는 성산일출봉에게 조용히 인사를 했다.



연두빛의 성산일출봉 / 캐논AE1


무작정 혼자 떠난 제주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오전 시간대여서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화 해변을 짧게 산책한 게 전부였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세화리의 고즈넉한 풍경에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나마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가보지 못한 제주의 풍경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다 김녕 해수욕장의 자태를 보고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다음에 제주를 찾을 때 새롭게 가보고 싶은 곳, 다시 가고 싶은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나의 고향, 서울


비행기에서 제주의 하늘을 사진으로 담았다. 김포에 가까워질 무렵 서울의 하늘도 찍었는데 같은 날 비슷한 시간이었음에도 풍경이 확연히 달랐다. 하늘에서 본 제주는, 바다는 맑고 푸르고 곳곳에 오름이 초록빛으로 선명했는데 서울은 오직 회색뿐이었다. 잔뜩 낀 미세먼지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소음들. 막아도 피해도 스며드는 것들, 오염된 공기와 소리는 그렇게 다시 내게 스며들었다. 나만의 고요한 시간들을 제주에 두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남겨 두어야 다시 가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짧은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다, 나의 고향, 서울로.






세화해변에서. / 캐논A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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