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소강 May 22. 2018

케이크의 맛을 꼭 정의해야 할까

영화 <케이크메이커>(2017) 리뷰

영화 <케이크 메이커>의 전체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코 마냥 달콤하진 않은 

영화 <케이크메이커>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아무 정보 없이 보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영화 <케이크메이커>는 그 즐거움을 최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준 영화였다. 시사회에 초대받아서 극장에 비치된 브로셔만 보았는데 거기에 담긴 영화의 톤 앤 매너와 실제 영화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마케팅에 낚였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았다. 무겁게 그리면 사람도 보지 않게 테니 최대한 '달콤하게' 보여서 관객을 이끌려고 했던 모양이다. 마냥 달콤한 영화는 굳이 영화로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런 단편적인 이야기는 장식적이고 인위적이다. 

영화 <케이크메이커>는 홍보 문구 같이 달콤한 케이크와 빵으로 달달하게 치유하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케이크 맛만 보고 극장을 떠나면 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던진 물음을 크든 작든 품고 극장을 나서야 하는 영화다.

 

국내 공식 포스터





토마스, 오렌, 아나트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카페 겸 베이커리 '크레덴츠'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크레덴츠'의 베이커 '토마스'는 종종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 '오렌'과 말문을 트게 된다. '오렌'은 이스라엘인으로 출장차 한 달에 한번 꼴로 베를린에 방문한다. 서툰 독일어로 토마스에게 케이크 추천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아내를 위해 쿠키를 포장하기도 하며 아들을 위한 선물을 함께 골라달라고 부탁도 한다. 토마스는 서툴러도 홀로 독일어로 주문을 해내려는 오렌을, 케이크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오렌을 가만히 응시한다.



두 사람은 서로 감정을 확인하고 일 년 간 사랑을 키워가지만 가정이 있는 오렌을 일방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토마스는 답답하다. 자신을 드러낼 수도 없고 오렌에게 가정을 포기하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 이스라엘에 다녀온 오렌에게 아내와 언제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 묻는 토마스의 심정은 그가 만드는 케이크처럼 층층이 안타까움이 서려있다. 그가 소유할 수 없는 오렌의 순간을 전해 들으면서 케이크에 생크림을 덧입히듯 켜켜이 쌓인 안타까움을 감춘다.



토마스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기보다 안으로 쌓아두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그가 영화에서 격한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은 단 한 번뿐이다.(영화 후반부에 등장한다.) 큰 감정의 변화를 겪는 순간은 두 번 더 있지만 이때조차도 숨기고 삼킨다. 세 번의 순간 모두 영화의 변곡점에 해당한다. 


토마스가 감정을 숨긴 두 번의 순간; 여느 때처럼 베를린에 출장을 왔다가 이스라엘로 돌아간 오렌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을 때. 오렌의 흔적을 찾아 신분을 숨기고 만난 그의 아내에게서, 오렌이 가정을 버리고 토마스를 선택하려고 떠났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토마스는 두 번 모두 감정을 삼키고 숨긴다.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드러낼 자신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외로이 살아온 토마스에게 오렌은 아마도 진정한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오렌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을 것이고, 나아가 오렌이 죽기 전에 한 결심은 여러모로 토마스에게는 큰 의미이자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섬 같은 사람, 토마스

토마스는 섬 같은 사람이다. 군중 속에 홀로 서서 그들을 조용히 관찰하면서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 사람. 육지와의 연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망망대해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섬 같은 사람. 오렌은 섬으로 찾아온, 그리고 그 섬에 정착하겠다고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자 사랑이었다. 


토마스는 오렌의 흔적을 찾아 이스라엘로 떠난다. 생전 그가 했던 말의 단서를 모아서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를 찾아가 맴돈다. 오렌의 아내 '아나트'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바쁘게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일손이 부족한 아나트는 토마스를 고용하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긴 채 아나트와 오렌의 아들 곁에 머문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유대교 의식에 벗어나는 음식은 취급하지 않고 먹지도 않는 절대적으로 종교적인 곳. 이곳에 정착한 독일인 토마스.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나트의 카페가 토마스가 만든 케이크로 입소문을 타면서 토마스는 점차 아나트와 그의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아나트는 물론 오렌의 아들도 토마스에게 점차 마음을 연다. 그리고 토마스도 예루살렘의 종교의식을 점차 체화해간다. 오렌이 입었던 옷과 그가 살았던 집을 드나들면서.


토마스가 오렌의 아들과 함께 쿠키를 장식하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아들의 눈빛 너머 존재하는 오렌의 흔적을 바라보는 토마스의 슬픈 눈빛이 교차되는 장면은 토마스에게도 관객에게도 '에피파니(현현)'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유대교의 샤밧 식사에 참석한 토마스는 상상 속에서 오렌과 마주한다.


*샤밧 [Shabbot]: 금요일 해 질 녘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해 질 녘까지 이르는 안식일로, 가족 친지와 같이 저녁 식사하고 휴식을 취한다. 이스라엘의 삼대 명절의 하나인 유월절, 초막절과 같은 ‘순례 절기’ 중 하나이다.



그 섬을 찾아온 오렌과 

그 섬이 찾아간 아나트


아나트가 토마스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이 관계는 모두 무너지고 만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나트의 오빠 '모티'가 그를 쫓아내며 폭력을 가하지만 그럼에도 토마스는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떠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쉽게 탄로 날 줄 알았으면서도 토마스는 아나트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여기서 토마스는 감정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목놓아 울고 만다.


토마스가 빵을 반죽하면서 서럽게 우는 후반부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토마스의 감정 표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더 이상 오렌의 흔적을 붙잡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서러웠던 것일까. 아나트에 대한 연민의 감정 때문이었을까. 오렌을 사랑하면서도 아나트도 사랑하게 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복잡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이 복잡한 감정이 모두 섞인 눈물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게이다. 예루살렘에 머물면서도 몇몇 남성들과 눈길을 주고받고(그가 독일인이기 때문에 쳐다봤던 것일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그윽했다.) 아나트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녀에게 키스했던 오렌의 흔적을 상상한다. 그렇다고 해도 토마스는 아나트도 사랑했을 거라 본다. 아나트 역시 그랬을 것이다. 토마스의 정체를 알게 되고 거짓말에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토마스가 떠난 뒤 그의 흔적을 몰래 뒤진다. 그리고 삼 개월 후 홀로 베를린으로 떠나 여전히 크레덴츠에서 일하는 토마스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




같은 실 끝을 한쪽씩 쥐고 선 사람들


토마스와 아나트의 관계와 감정은 조금만 다르게 만들어도 완전히 다른 맛이 나는 케이크 레시피처럼 복잡하면서도 여리게 얽혀 있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겪었고 그 아픔을 치유하며 서로를 사랑하게 됐다. 토마스와 아나트는 연인이라기보다 같은 색의 실 끝을 한쪽씩 쥐고 실을 점점 당기다가 마주 서게 된 사람들이다. 같은 색의 실을 함께 쥔 작은 공동체다. 국가와 종교와 성적 취향은 전혀 다르지만, 심지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 역사가 낸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토마스와 아나트의 감정은 그렇게 얽혀 있다. 토마스가 만들었던 레시피를 바탕으로 아나트가 예루살렘에서 계속해서 케이크를 만든 것도, 아나트가 끌리듯 베를린의 크레덴츠를 찾은 것도 그 실의 작은 매듭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 달콤한 케이크와 빵들이 등장해서 군침이 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자체는 마냥 달콤하지 않다. 너무 단 케이크를 먹다 보면 가끔 입이 쓰듯, 영화는 그 쓴맛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그 쓴맛까지도 케이크 맛의 일부라고 생각하느냐고. 


우리는 토마스와 아나트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혹은 아니라고 한다고 해도 사랑의 경계를 어디에, 그리고 어디까지 두어야 할까. 


혹은 충분히 느끼고 있는 이 맛을, 이 사랑을 정의하고 구분 짓는 것이 과연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는 한 걸까. 



토마스가 떠나고 아나트는 토마스의 레시피를 따라 빵을 만들어 판다. 어렵사리 받았던 '코셔' 인증서는 결국 박탈당했지만(인증서가 있어야만 손님을 더 끌어들일 수 있는 듯하다. 안심할 테니까.) 아나트는 더 이상 코셔 인증서에 집착하지 않는다. 빵을 사려는 손님이 코셔에 관해 묻자 아나트는 대답한다.


코셔 인증은 받지 못했지만 율법에 어긋나지는 않아요.
드실지 말지는 손님이 선택하세요.


* 코셔 (Shabbot): 유대교 율법에 의해 식재료를 선정하고 조리 등의 과정에서 엄격한 절차를 거친 음식. 이스라엘에 유통, 수입되는 식료품은 이스라엘 랍비청의 코셔 인증이 필요하며, 사전적으로는 ‘적당한’ ‘합당한’의 의미로 유대인의 율법에 상응하는 정결한 음식을 칭한다. 
 




#에피파니의 순간

'빵'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특히 토마스와 오렌의 아들이 함께 쿠키를 만드는 장면은 레이먼트 카버의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원제: A small good thing)> 마지막 장면이 연상되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투박한 빵을 만들며/먹으며 치유하는 과정, 현현의 순간. 그리고 김연수의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소설가 '나'가 시각 장애인 도서관장과 녹음 CD를 함께 듣는 장면도 떠올랐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도.


#8년이라는 시간

이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무려 8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영화 초반과 중후반에 토마스의 외모가 눈에 띄게 바뀌는 데 제작기간을 알게 되니 이해가 됐다. 감독의 끈기와 꾸준함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들은 실제 에피소드들을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고 지치지 않고 영화를 찍었다. 게다가 케이크 레시피북도 아주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것 같다. 제작노트에서 감독은 "거의 영혼을 파는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다양한 감정이 담긴 <케이크 메이커>를 완성시키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의 싸움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다. 작품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라고 말하며 작품을 향한 남다른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들었던 실화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해냈고, 자신의 삶 속에서 느낀 음식, 유대인, 종교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시적으로 완성시켰다. 특히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로 ‘집착’을 꼽는다. 자신의 첫 장편 작품인 <케이크 메이커>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며, 웰메이드 드라마를 탄생시키기 위한 끝없는 열정으로 뭉친 프로듀서들과의 의기투합으로 작품은 그가 원하던 그대로 완성되었다. 오피르 라울 그라이저 감독은 “거의 영혼을 파는 것과 같은 과정을 통해 마침내 영화를 완성시켰다. 벽돌을 하나씩 쌓는 작업 같았다”라고 연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_제작노트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조셉의 레몬과 로잘리의 부사(adverb)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