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안 낳아?”
어려운 질문 참 쉽게들 하신다. 첫째를 낳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인데 난 이 물음에 솔직히 대답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첫 육아가 버거웠다. 초보 엄마는 무지의 영역에서 부딪치는 일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몰랐다. 설령 그게 사사로울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차갑고 치열한 이 세상에서 생명을 지키는 일은 남들이 한 마디씩 툭 던지듯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외동으로 확정할까? 싶었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이 선택지도 망설였다. 자녀가 둘 이상인 집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가보지 않은 길을 놓고 쫓기듯 대답하는 건 내 진심을 묻어두는 행위였다.
돌아보니 내게는 둘째에 대한 양면의 마음이 있었다. 둘째 임신 전에는 출산과 육아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엄두가 안 났고 한편으로는 아이가 둘 이상인 집이 부럽기도 했다.
작년 가을이었다. 여기저기 단풍이 들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던 시월의 어느 멋진 날, 우리의 둘째 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몸에서 콩보다 작은 생명이 다시 반짝거렸다. 초음파 사진을 들고 홀로 병원을 나서면서 예상과는 달리 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우리에게 와줘서 고마운 마음이, 가족이 더욱 돈독해질 것 같다는 기대감이 따라왔다.
첫 임신 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가물가물 흐려지기도 했다. 입덧이 시작되면서 체력은 바닥치고 잠은 쏟아졌다. 배가 빨리 불렀다. 첫째 때는 임신 5개월이 되어도 티가 나지 않았는데, 둘째는 10주부터 배가 커졌다. 첫 임신 때는 산부인과 가는 날이 몹시 더디게 찾아왔던 것 같은데, 두 번째는 예약 날짜가 금방 다가왔다. 4년 전에는 남편이 휴가를 내서 병원을 함께 찾았지만, 이번 임신 때는 홀로 다녀오는 날이 많았다. 아울러 첫 임신은 임신 진행 주수마다 특별한 이야기를 소상히 기억했는데, 이번에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출산일이 임박했다.
팬데믹은 임신과 출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태교 여행은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만삭을 기념하는 사진은 조심스레 찍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원이 조용해졌다.
첫째를 낳았을 때 신생아실 앞은 내 손님과 다른 산모들의 면회객이 섞여 아기를 축복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엄마는 수유실을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자주 마주치는 산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병실마다 손님들이 모인 소리가 복도로 새어 나오고 그때마다 첫째 아이들의 귀여운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우리 둘째가 태어난 시기는 그럴 수가 없다. 엄마도 하루 한번 15분! 예약을 통해 면회가 가능했다. 아빠 이외에 모든 면회는 불가. 철저히 외부인 출입을 제한했다. 다른 이들과 접촉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따뜻한 조명 아래 커다란 창으로 볼 수 있던 아기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유리창에는 아이보리색 커튼이 쳐졌고 그 앞을 채운 인형만이 이곳이 신생아실임을 알려줬다. 어쩌다 병실 복도를 걸으면 옆방 산모의 영상통화 소리가 들렸다.
갓 태어난 우리 둘째가 일가친척의 사랑과 덕담을 받을 수 없어 아쉽고 미안했다. 그나마 나는 하루에 한 번은 볼 수 있으니 특권을 누린 셈일까. 그래서 조리원으로 옮기는 날이 기대되었다. 그곳에서는 병원에서보다는 더 많이 아기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와 다시 헤어진 후 눈물의 삼계탕을 싹 비우고 있다가 불현듯 아기가 보고 싶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 방에서 1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신생아실에서 우리 둘째가 예쁘게 자고 있었다. 아기 침대에 설치한 베이비 캠과 연동된 어플을 통해 아기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만, 이렇게 직접. 마음껏. 보는 건 처음이라 한참을 그 앞에 서서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로 바쁜 날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유 수유를 위해 하루에도 수시로 만났고 매일 2시간 모자동 시간에는 아기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첫째와의 모자동 시간은 아기가 울까 봐 덜덜 떨고 기저귀 교체하는 법을 몇 번이나 배우며 모든 게 호들갑, 난리법석이었는데 둘째와의 시간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초여름 비가 내리던 유월의 밤이었다. 바깥바람이 반가워서 창문을 조금 열어놨다. 아기가 내 방에서 맘마를 먹고 잠이 들어 빗소리가 유독 도드라졌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여러모로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늘 미안했는데, 우리 둘이서만 있을 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떠올랐다.
아기 옆에서 음악을 켰다. 비처럼 나지막한 소리로 선율과 가사가 흘렀다.
Io ti costruirò una casa e poi ti servirò come un altare,
io t'insegnerò ad andare come vanno via gli uccelli
그대를 위한 집을 짓고, 그대를 소중히 모실게요
새처럼 힘차게 나는 법을 알려 줄게요
Io farò della mia anima lo scrigno per la tua bellezza,
io mi prenderò le pene nel sepolcro del mio petto,
내 영혼을 그대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한 보석 상자로 만들 거예요
그리고 마음속 고통은 내가 짊어지겠어요
첫째와 함께하는 모든 첫 순간은 어설펐다. 여기에 혹여나 작디작은 생명이 잘못될까 봐 걱정이 더해졌는데, 초보 엄마의 불안을 모두 아는지 아기는 최선을 다해 울어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안함과 자책감으로 무너졌다.
육아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아기의 옹알이는 천사 때 쓰던 말이라는 글을 읽었다. 순간 그 문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 마음속 깊이 들여놨는데, 그 후로는 아기를 대하는 마음에 한결 여유가 느껴졌다. 이 말에 의하면 우리 둘째도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천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삶(in un'altra vita)에서 둘째와 우리 가족이 함께 만난 것이다.
둘째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 아기에게는 엄마가 ‘아주 조금은’ 덜 서툴 것 같다는 마음이 조심스레 피어올랐다. 우리가 만나기 전에 나는 이미 엄마였으니까. 먼저 이 세상에 도착한 첫째와 함께하며 숙련된 것들이 그래도 몇 가지는 있을 테니 말이다.
내 마음에 너를 위한 집을 짓고 항상 소중히 여길게.
힘차게 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엄마가 늘 노력할게.
너의 사랑스러움과 영롱함을 내 영혼의 보석상자에 담고
네가 좌절하거나 고통의 시간을 헤맬 때
내가 담아놓은 너의 빛으로 다시 너를 일으켜줄게.
dentro una carezza, nel miracolo di un tetto,
nella luminosità di un domani che sarà
e sarai passione, affetto e strada che non finirà
사랑스러운 손길과 저 하늘의 기적
빛나는 내일의 찬란함 속
당신은 열정이자 사랑 그리고 끝없는 길이죠
Io, te e quel nostro bene, tutti e tre ci teniamo insieme
ora e qui ci andrà forse meglio
나, 그대 그리고 우리의 사랑, 모두 함께해요
아마 우린 더 행복해질 거예요
너를 향한 모든 기적이 앞으로의 길을 밝혀줄 거야.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만났기에 서로 더 행복해질 거야.
음악 듣기 딱 좋은 날이었다. 아기는 새근새근, 여전히 내 곁에서 잠을 잤다. 첫째 때는 아기를 온전히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그때는 놓쳤던 경이로움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평생 기억하고 싶었다.
우리 둘째와의 이 순간을.
글을 통해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같은 시기에 태어난 아기들에게.
♡ 다음 이야기 : 창문으로 인사하는 날들
* 음악 - In Un'altra Vita by 포레스텔라(Forestella)
* 가사 출처 - 팬텀 싱어 2 1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