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가 풀리자 예정된 통증이 서서히 느껴졌다. 이 고통은 첫째 때 이미 겪었기에 알고 있던 아픔이었다. 두 번째라고 덜 아프진 않았다. 다만, 4년 만에 출산으로 그사이 발달한 의술 덕에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 난 병실 침대에 누워서 칼로 째고 불로 지지는 듯한 아픔을 약발에 의존한 채 이겨내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약도 믿으며.
병실에 혼자 있으니 참 심심했다. 수액을 맞아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먹는 재미마저 없으니 하루가 영 밋밋했다. 그러다가 출산 27시간, 금식 42시간 만에 드디어 첫 끼니와 영접했다. 내가 잘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쌀가루 미음과 건더기 제로 동치미. 그리고 국간장으로 간을 한듯한 진한 미역 국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젓가락은 사치라는 듯 아주 친절하게도 숟가락만 얹은 식판이었다. 나는 이 감격스러운 음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사진에 먼저 담고 오른손에는 수액과 항생제를 꽂은 채 짠맛과 감칠맛으로 가득한 첫 끼를 후루룩 마셨다.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이렇게 맛깔난 음식은 몇 번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음을 시작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어서 식사 시간이 오기만을 바랐다. 다음 식사 시간에는 씹을 거리가 있었다. 깨진 밥알이 보이는 창백한 죽과 깨를 담뿍 담은 간장, 건더기를 송송 썬 물김치와 소고기 미역국.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번엔 거들라면서 젓가락까지 올라왔다.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고 식사에 집중했다. 혼자 있던 내게 여전히 간단한 식판은 쏠쏠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내일부터는 간식과 야식도 나오겠군.’
첫 번째 출산 때를 곰곰이 떠올려보니 미음과 죽이 한 번씩 나오면 그 이후부터는 산모식으로 일반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거기에 낮 간식과 야식도 추가된다는 사실까지 기억하니 나도 모르게 설렜다.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식탁으로 쓰던 탁자를 깔끔하게 정돈해놨다. 새삼스레 물도 떠놓고 주변이 깨끗한지 확인도 마쳤다.
“식사 왔습니다.”
라는 여사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면 구수하면서 알 듯 말 듯 한 복합적인 음식 냄새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어떤 반찬 일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식판을 내 앞에 놓고 나가시면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러면 나는 다시 혼자 남겨진 병실에서 맛있는 밥을 편하게 먹는 호사를 누렸다.
예상한 대로 입원 3일 차부터는 고슬고슬한 밥과 신선한 나물, 고기나 생선 같은 단백질과 절대 빠질 수 없는 푸우욱~ 끓인 미역국 그리고 가벼운 후식이 추가되었다. 이런 영양 만점 삼시 세끼는 급식 시절 이후 출산 때만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밥이 그 밥, 그 반찬이 그 반찬인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되니 남이 해준 밥은 늘 맛있었는데, 그 밥도 산모식으로 계속 먹다 보니 질린 것 같다. 내가 배가 불렀는지 심지어 경건한 마음도 사라져서 사진도 찍지 않았다. 퇴원 때까지 빠짐없이 매 끼니 미역국이 올라왔다. 과장 조금 더 보태서 둘째까지 낳으니까 내 평생 먹은 미역국 횟수를 초과할 것 같았다. 난 미역국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먹으니까 지겨워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잘 움직이질 못하니 살이 되려 찌는 느낌까지 들었다. 몸을 어서 원복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먹었다가는 살이 빠지기는커녕 예전 옷을 죄다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산모식과의 권태에 빠져들 때쯤 병원과 작별을 할 시간이 다가왔다. 퇴원과 동시에 조리원으로 옮기는 날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아빠 외에는 병원 출입이 불가했는데, 드디어 퇴원하면서 잠시나마 첫째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단출한 짐을 싸고 퇴원 절차를 밟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기다렸다. 내 심장은 두 배, 세 배로 쿵쾅거렸다. 드디어 아기와 함께 퇴원한다는 설렘, 그리고 드디어 첫째를 안아 볼 수 있다는 기쁨이 마구 교차했다.
태어난 지 5일이 된 아기를 안은 남편과 함께 로비로 향했다. 저 멀리서 할아버지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첫째가 보였다.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지만 큰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이리저리 산만하게 움직이던 첫째가 나를 보자마자 내게 무작정 뛰어왔다.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그래도 꾹 참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나도 뛰고 싶었다. 아직 부푼 배를 부여잡고 뒤뚱뒤뚱 걸어 첫째를 와락 안았다. 5일 만에 만난 우리 첫째는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었고 나를 안고 웃고 있었다. 직접 만난 동생을 보며
“사랑이 예뻐.”라며 좋아했다.
차를 타고 네 식구,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조리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함께 하면서 시간이 유독 짧게 느껴졌다. 조리원에서는 첫째 아이와 2주간 떨어져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잘 지내리라 믿으면서도 또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시 그 시간이 왔다. 또다시 남편만 출입이 가능한 조리원 문 앞에서 인사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나와 아기, 남편까지만 입실하고 첫째는 할아버지, 그리고 조리원으로 오신 할머니와 함께 문을 사이에 두고 멀어졌다.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조리원에 들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조급했다. 입실 준비를 하면서 투명한 문을 사이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몇 밤만 자면 그때는 엄마가 집으로 간다며 몸짓으로 말을 전했다.
첫째 아이는 울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내가 아까 준 포도 주스를 들고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 사이 둘째 아기는 신생아실로 향했고 남편은 내 방에 짐을 풀어주었다. 이제 남편도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정말로 배웅을 마친 후 내 방으로 향했다.
‘이럴 거면 오늘 만나지 말걸.’
잠깐이라도 첫째 아이를 만날 수 있음에 기뻤지만, 다시 헤어지는 슬픔은 그 이상으로 컸다. 오늘을 후회하며 내 방에 도착했다. 또다시 나만 남겨진 방에 유일하게 나를 반기는 따뜻한 존재가 있었다. 조리원에서의 첫 식사가 그 사이 도착한 것이다.
‘여기 미역국은 어떠려나?’
기대라고는 1도 없이 국그릇 뚜껑을 열었다. 놀라고 말았다. 미역국이 아니라 삼계탕이었다. 삼시 세끼 미역국이 나오는 조리원에서 나름 특별실로 준비한 메뉴였다. 배려가 넘쳐흐르는 그 음식을 하필 첫째와 다시 헤어진 타이밍에 마주 했다. 삼계탕은 우리 첫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삼계탕을 먹는 날에는 아이가 내 옆에 앉아서 내가 발라준 살코기를 웃으며 먹는다. 우리 딸이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 앞에 올라온 온전한 닭고기가 나만을 위해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았다.
조리원에서 삼계탕이 왜 나와!!!!
첫째가 보고 싶어 애끊는 마음은 출산의 모든 과정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내내 잠재웠던 그리움은 삼계탕이 트리거가 되어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제야 둘째 엄마들의 유난을 최초로 깨닫게 되었다. 먹어야 산다. 이 밥을 먹어야 집에 간다. 내가 건강해야 하니까 나를 위한 삼계탕을 입에 욱여넣었다. 눈물 젖은 닭고기를 철근같이 씹으며 다짐했다.
‘내가 집에 가서 애한테 화를 내면 인간이 아니다.'
♡ 다음 이야기 : 둘째 아기에게 들려주고 싶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