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 떤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임신 전에는 엄마들이 둘째를 출산하면 첫째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매일 운다는 얘기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게 힘들어서 조리원 조기 퇴소는 물론 천국이라는 조리원행을 아예 포기한다는 엄마도 봤다. 출산을 앞둔 어느 날, 나보다 한 달 먼저 둘째를 출산한 후배가 조리원에서 열두 번은 더 울고 있다고 안부를 전했다.
"언니, 둘째 낳기 전에 첫째한테 제발 잘해줘요."
라며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래, 보고 싶을 것 같긴 한데. 나도 좀 오랜만에 쉬자.’
모쪼록 그 마음을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하도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여, 내게 둘째 출산을 앞두고 가장 큰 두려움은 제왕절개 후 따라오는 후불 통증도 아니요, 뒤이어 동반되는 찌릿찌릿한 젖몸살도 아니요, 밤중 수유로 잠을 못 자는 피로도 아니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 원형 탈모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도 아니요, 살이 안 빠져서 추레한 내 모습에 짜증이 솟구치는 상황도 아니었다. 오로지 첫째. 첫째. 첫째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두려웠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부디 잘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둘째 출산이 임박해질 무렵 첫째 아이도 다 알고 있는 건지 유독 예민해졌다. 그 예민함은 서로를 뾰족하게 찌르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아이는 (내 입장에서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짜증을 내거나 삐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만삭 몸으로 빨래와 청소 등 출산 전 집안일을 해치워야 하는 나는 그 투정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은 것은 물론 목소리 자체에 화가 탑재되어 있었다. 특히 출산 1주일 전부터는 날 선 싸움 후 매일 밤 울음이 이어졌는데, 아이의 한마디에 나는 그 싸움에서 항상 패배자가 되었다.
"흑흑흑흙흙 흐륵흐르륽 .... 엄마가 병원 가면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속상해. 엄마를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
이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무슨 후회를 하려고 애한테 화를 낸 건지, 내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자괴감에 빠졌다.
“엄마도 우리 딸 보고 싶을 거야. 엄마가 건강하게 집에 와서 많이 안아줄게.”라며 약속을 하면서 아이를 안은 채 잠이 들곤 했다.
밤의 참회는 아침이 선사하는 현실에 지고 만다. 전날 밤의 반성은 또 까맣게 잊고 낮에는 짜증과 분노가 대치하고 밤에는 또 울고 사과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출산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계획했던 집안일은 마무리되었다. 가족들과 만찬을 하고 출산 가방도 다 꾸려놓았다. 이부자리를 펴고 늘 그랬듯 첫째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재우고 있었다. 오늘이 고단했던 모양인지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잠결에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만져보니 문득 이 촉감이 그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밤이 지나면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밤을 보내게 된다. 그것도 손가락 열 개를 다 세고도 넘는 날들이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여전히 보들 거리는 손과 가는 머리카락이 주는 부드러움을 느끼자니 첫째가 너무 보고 싶을 거라는 그간의 조언에 조금이나마 반응을 하듯 온몸이 들썩였다. 마침 천둥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비가 내리는 5월의 밤이었다. 처음으로 나를 엄마로 만들어준 아이를 뒤에서 껴안고 부디 시간이 어서 가기만을 바랐다. 천둥이 내 소리를 삼켜줘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새벽.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아이가 잘 갔다 오라며 웃으며 인사해줬다. 어제만 해도 울고불고하던 모습이 어디로 간 건지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한결 포근해졌다. 그 웃음 덕분에 수술대 위에 올라가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아마 내 척추에 바늘이 꽂히는 것 같은데도 아프지 않았다. 곧 잠이 들 거라는 말을 들었다. 서서히 다리는 저릿해지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건강하게 만나자고 매일 약속한 걸 기억한 건지 우리의 둘째 아기도 무사히 태어났다. 마취 중 잠깐 들었던 아기의 울음소리에 또다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제 나만 회복하면 되겠군.'
잠에서 깨보니 회복실에 누워있었다. 남편과 아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첫째 아이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아직 잠에 취한 상태지만 반가운 마음에 받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첫째가 엉엉 울고 있었다. 새벽에 보여준 씩씩함은 어디 간 건지 목놓아 울고 있는 모습에 당장이라도 일어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어떻게 어떻게 달래보고 전화를 끊은 뒤부터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때부터 입원 4박 5일, 조리원 13박 14일이 언제 지나갈지 너무나도 아득하게 다가왔다. 병실 벽면에 걸린 시계가 유독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허나, 시간은 흘러갔다. 수술 하루가 지나고 나는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신생아실 면회도 다녀왔다. 또 하루가 지나니 팔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바늘을 제거하고 준비된 마사지도 받고 왔다. 이렇게 내가 회복하는 동안, 동시에 아이가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영상통화가 걸려왔고 조금 조용하다 싶으면 내가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어서 내가 전화를 걸어봤다.
그때마다 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음식을 먹거나 놀고 있거나 유치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재잘재잘 이야기도 잘해주고 우리 집 상황이 어떤지 소식을 소상히 전하기도 했다. 까르르 웃다가도 별안간 엄마를 못 봐서 화가 나 토라진 뒷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엄마 안아줘.”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지금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데 내가 건강하게 회복해서 집에 가야 아이들도 돌볼 수 있다며 주문을 외워보았다. 그렇게 병원에서의 시간이 흘러 퇴원을 앞두고 첫째 아이를 잠깐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찾아왔다.
♡ 다음 이야기 : 산후조리원에 삼계탕이 왜 나와!